프로복싱은 한때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스포츠였다. 현역 세계챔피언이 챔피언 벨트를 내던지고 격투기행을 택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초유의 일이다.
김기수 유제두 홍수환 장정구 유명우…. 요즘 10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30대 이상에게는 ‘두 주먹의 신화’를 일군 한국 최고의 스포츠스타들이다. 홍수환은 4전5기, WBC 선정 20세기 최고의 복서 중 한 명인 장정구의 파마머리, 유명우의 최다방어기록 등은 한국 스포츠의 ‘전설’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챔피언들의 화려함을 보며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10대들이 복싱을 배우겠다며 체육관을 찾았다. 목표는 오로지 하나, 부와 명예가 보장된 세계챔피언이었다. 그 당시 꼬마들은 지금 아이들이 장래 희망으로 ‘축구선수’를 외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로 ‘세계챔피언!’을 외쳐댔다. 압도적인 선호도 1위였다. 세계타이틀전에서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김득구의 삶을 소재로 한 복싱영화의 제목이 ‘챔피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 유일의 현역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스스로 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지인진은 지난 7월 4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복싱 포기 및 K-1 진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일요신문의 보도(4월29일자) 후 복싱계에서 많은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계타이틀매치를 언제 하게 될지, 또 개런티를 얼마나 받을지조차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잠깐 후배의 일을 거들어 주기도 했다. 사이가 멀어진 프로모터와 매니저 측으로부터는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운동도 전혀 하지 못했다. 목표가 없는데 무턱대고 운동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35년 평생을 바쳐온 복싱이기에 안타깝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지인진은 이미 FEG코리아와 수차례 접촉했고 구체적인 세부 계약 내용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계약금과 파이트머니 등 계약조건은 지난해 2월 K-1에 진출한 선배 최용수(공식 발표액은 3년간 10억 원)보다 조금 많은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용수가 더 상위체급(WBA슈퍼페더급)이고 또 인지도도 높지만 지인진의 경우 ‘현역’인 점을 감안해 대우가 더 좋아졌다.
지인진은 “(최)용수 형과도 많은 의논을 했다. 이제는 K-1에 진출해 안정된 수입을 얻고 또 좋은 경기로 복서가 링의 주인임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지인진 영입을 담당하고 있는 FEG코리아의 양명규 이사도 “이미 일본의 FEG 본사와도 지인진을 영입하기로 협의를 마쳤다. 타니가와 사다하루 FEG 대표가 큰 관심을 보이고 있고 세계적인 뉴스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지인진과 FEG코리아는 계약서에 최종 사인을 하고 공식발표를 하는 일만 남겨 놓고 있다. 오는 7월 21일 서울에서 K-1 FN KHAN 2007 세계대항전이 열리는 까닭에 이 자리를 이용해 ‘현역 세계챔피언의 K-1 진출’을 알리며 홍보를 극대화한다는 계획이다. 양명규 이사는 “K-1 자체적으로도 기술이 뛰어나고 또 동양인 스타플레이어 탄생이 유리한 맥스대회(70kg 이하의 경량급)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인진은 최용수와 함께 맥스급에서 한국의 간판스타로 좋은 활약이 기대된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최용수는 절친한 후배 지인진이 K-1 진출을 결심하자 1년여 동안 먼저 경험한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며 나섰다. 현재 자신이 운동하고 있는 21세기권도체육관의 박현성 관장에게 지인진을 받아들이자고 부탁했고 승낙을 받았다. 지인진이 본격적인 K-1 준비에 착수하면 합동 훈련을 할 계획이다.
최용수는 “지인진의 평상시 체중이 나보다 오히려 더 많이 나간다. 유명우 선배님에 견줄 만한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평가받았던 만큼 K-1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용수와 지인진은 현역시절 체급이 달라 공식 대결은 갖지 못했지만 수많은 스파링을 했다. K-1에서 둘의 대결에 대해 최용수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워낙에 절친한 사이라 가능하면 서로 맞붙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하지만 둘이 모두 성공해 하나뿐인 맥스급 챔피언 벨트를 놓고 경쟁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라고 대답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