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패색이 짙던 후반 38분에 회심의 첫 골을 터트린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심영성(20·제주 유나이티드). 캐나다에서 벌어진 U-20 청소년월드컵대회에서 주전 공격수로 출전하며 굉장히 인상 깊은 플레이를 펼친 그는 지난 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득점왕에 오르는 등 발군의 기량을 선보여 일찌감치 차세대 스타플레이어로 기대를 모은 바 있다.
‘제2의 박지성’ ‘제2의 박주영’이란 타이틀 대신 ‘축구 잘하는 공격수’로만 인정받고 싶다는 심영성은 배짱과 기질, 자신감과 목표, 그리고 외모(?)까지 20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탁월한 입담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소속팀 선수들이 모두 강원도 태백으로 전지훈련을 떠나고 없는 가운데 혼자 제주에 남아 달콤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심영성을 직접 만나봤다.
심영성을 처음 만난 장소는 제주 공항이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만 알려줬을 뿐인데 공항으로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이다. 점심시간 무렵이라 제주 시내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향토음식점을 찾아 갔다. 갈치구이와 고등어조림을 시켜놓고 밥을 먹는데 처음엔 수첩에 적어가면서 인터뷰를 하다가 나중엔 식사와 필기를 병행하는 게 힘들어 아예 녹음기를 틀어놓고 여유있게 식사를 했다.
스무 살 축구선수와의 인터뷰…. 답변이 제대로 나올까 싶어 걱정이 한가득이었지만 막상 심영성을 만나보니 젊은 선수 특유의 솔직함을 무기로 ‘리얼토크’란 타이틀에 굉장히 충실한 내용들이 쏟아졌다.
#벌써 프로 4년차
이번 U-20 청소년대표팀(청대팀)의 21명 선수들 중 프로팀에서 활약 중인 선수는 모두 15명. 6명이 대학생인데 반해 15명은 돈을 벌고 있는 프로 선수들이었다. 대부분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에 입단한 바람에 프로 4년차 이상이 수두룩했다. 제주 제일고등학교에서 2004년 성남 일화에 입단한 심영성도 프로 4년차.
“그래서인지 역대 청대팀 선수들보다 지금 청대 선수들 실력이 월등히 나았어요. 성인 무대의 경험이 풍부하니까 플레이에 자신감도 있었고 훈련 때는 심하게 장난치다가도 막상 경기장에 들어가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거든요. 소속팀에서 막내로 억눌려 살다가 또래 선수들과 어울려 있다 보니 색다른 재미도 있었죠.”
심영성은 제주 유나이티드에선 공과 아이스박스 담당이었다. 훈련 전후로 선수들이 불편하지 않게 장비를 챙겨야 하는 게 막내 선수의 또 다른 업무인 것. 청대팀에서 최고참이었던 그는 소속팀과는 달리 은근히 고참 생활을 즐겼던 터라 다시 프로팀으로 돌아가면 꽤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다며 짓궂은 웃음을 띤다.
▲ 지난 4일 브라질전의 헤딩슛 장면. | ||
어느 경기보다도 후반 짜릿한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흠뻑 빠져들게 했던 브라질전의 헤딩골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영성의 장면 재생이 시작된다.
“상대가 워낙 강팀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어요. 하지만 질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죠. 첫 골을 먹었을 땐 어떻게 해서든 한 골만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골이 들어가니까 솔직히 힘이 빠졌어요. 세 번 째 골에선 ‘우린 이제 끝이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경기 중에 이상호(울산 현대)가 제 옆으로 와선 “형, 우리 이대로 끝나면 안 돼. 한 골이라도 넣자!”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 말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제가 헤딩골을 성공시키고 (신)영록이가 추가골을 넣었을 때는 ‘진짜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일찍 정신을 못 차렸던 게 두고두고 아쉽네요.”
심영성은 브라질 선수들의 뛰어난 개인기에 매료돼 게임을 하면서도 그들의 플레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기술적인 면만큼은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자신감도 있었단다.
#FIFA도 극찬
FIFA에선 미국과의 1차전이 끝난 뒤 홈페이지에 마치 ‘2002년 한국을 보는 듯했다’라며 청대팀의 경기력에 박수를 보냈다. 이에 대해 심영성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개인적인 의견이란 단서를 달고 말씀 드릴게요. 전 2002년 월드컵 때보다 우리가 더 좋은 경기를 펼쳤다고 생각해요. 그때 한국은 많은 움직임을 통한 압박축구를 강조했잖아요. 이번 청대팀은 패스 위주의 빠른 공수전환이 주특기였어요. 즉 우리가 많이 움직이기보다는 볼을 빠르게 패스하면서 상대 선수들을 많이 뛰게 만들었죠. 패스한 뒤에도 볼을 받으려고 바로 움직여줬어요. 훈련할 때는 장난 아니었어요. 주전과 비주전 사이의 기량 차이가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선수 개개인의 실력이 특출났거든요. 물론 앞으로 더 노력하고 고쳐야할 단점이 많지만, 성적으로 보여주진 못했지만, 경기 내용면에선 미국, 브라질이 안 부러웠다고 자신합니다.”
#박지성을 만나다
지난 6월 11일 대한축구협회에선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을 청소년대표팀 출정식에 초청해 후배들의 기를 북돋우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재미있었던 장면은 프리미어리거들 옆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 쟁탈전이 벌어졌던 부분. 이영표 옆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심영성은 원래 박지성 옆 자리를 탐냈다고 고백한다.
▲ 지난달 11일 프리미어리거 4인방과의 만남. 앞줄 맨 왼쪽이 박지성, 뒷줄 맨 오른쪽이 심영성이다. 심영성은 사실은 박지성 옆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연합뉴스 | ||
박지성이 부러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심영성은 부러운 게 아니라 고마울 따름이라고 수정했다. 한국 선수가 빅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최초로 보여줬고 후배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란 희망을 심어줘 감사했다는 설명이었다.
#제주 프랜차이즈스타 1호
심영성은 17세였던 2004년 성남 일화에 입단할 때만 해도 유망주로 손꼽혔다. 그러나 프로의 주전 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살벌할 지경이었다. 제주에서 날고 기었던 심영성도 1군에 이름을 올리기 힘들 만큼 프로팀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때 제주 유나이티드의 정해성 감독이 오래 전부터 눈여겨본 심영성을 영입하기 위해 성남의 김학범 감독에게 이적을 부탁하게 된다.
“처음엔 제주로 옮겨가는 게 싫었어요. 물론 고향팀이긴 하지만 그래도 뭍에서 뛰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성남에선 늘 찬밥 신세였고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선배들과의 경쟁도 너무 힘들었죠. 생각을 바꾸기로 했어요. 주전으로 뛸 수만 있다면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좋은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죠. 다행히 팀 옮긴 후 계속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아요. 감독님도 절 많이 믿어 주시고 책임감도 부여해 주셔서 오랜만에 재미있게 축구를 하고 있습니다.”
심영성의 최종 목표는 해외 진출이다. 프리미어리그보다는 스페인리그를 꿈꾼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프리미어리그는 이미 박지성 선수가 자리를 잡고 있지만 스페인은 아직 한국 선수가 도전해서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그 테이프를 끊고 싶다”는 남다른 속내를 밝혔다.
얼핏 들으면 ‘무리한’ 자신감이 한가득인 것 같은데 막연한 동경만 갖고 있진 않았다. 폭발적인 스포트라이트보단 차근 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그래서 기초공사가 튼튼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심영성다운’ 축구 선수로 성장하고 싶어 한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