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만난 노경은. 5년 전 화려했던 데뷔와 달리 많이 꼬였던 과거를 털고 이제 부활을 꿈꾼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7월 5일 선발등판 전날 밤
두산에서 함께 운동하다가 기아로 이적한 친구 전병두에게서 대구 삼성전 전날 전화가 왔다.
전병두(기아): 너, 내일 삼성전 선발이더라? 잘해라.
노경은: 다시 2군 내려갈 각오로 던질 거다. 내가 원하는 공을 던져보고 싶어. 그래도 만약에 내가 지면 호프집에 소주잔 세팅해 놔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노경은은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선발 자리가 비는 것보다 ‘땜빵’용으로 나갈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몸도 공도 좋았어요. 그래서 자신 있게 준비하고 있었죠.”
7월 6일 대구 삼성전 당일
경기 전 노경은은 배터리를 이룰 포수 채상병을 찾았다.
노경은: 저기, 형!
채상병: 어, 경은아. 3년 만이지, 선발등판?
노경은: 네. 그래서 말인데요, 형. 저 후회 없이 볼을 던지고 싶어요. 2군으로 쫓겨가는 한이 있어도 던지고 싶은 공, 후회 없이 뿌려보고 싶어요.
채상병: 그래. 팍팍 한 번 던져봐라. 형이 다 받아주마.
두산 김경문 감독은 노경은을 데뷔 초부터 타자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성장하게 했다. 덕분에 배짱만큼은 자신 있던 노경은은 마운드에서 일부러 고함을 지르면서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으로 공을 던졌다.
“못 던지면 2군 갈 각오로 마운드에 섰죠. 그래서 공 하나하나, 제대로 던지고 싶었어요. 내가 던지고 싶었던 공들을요….”
그런 노경은을 살리고 싶었을까. 그날 두산 타선은 난리가 났다. 1회에 2점, 3회 초에 6점, 6회 초 3연속 안타에 만루기회까지 겹친다. 이어진 김동주의 3루 땅볼로 1점 추가, 그리고 마지막 9회에서는 김동주가 125m 대형 홈런을 터트리며 3년 만에 선발승을 따내는 노경은을 축하해 주었다.
“울~컥 하더라구요. 2003년 데뷔하고 병역비리, 공익근무… 한 것도 없이 흘러간 지난 5년이 머릿속에 좌~악 펼쳐지는데 진짜 울 뻔했어요.”
그때 알았더라면~
2003년 두산 역대 고졸 최고 계약금 3억 5000만 원으로 입단한 노경은.
코치: 경은아! 너는 근육을 좀 빼야겠다. 상체가 거의 타자 상체인데?
노경은: 괜찮은데요 뭘~
코치: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근육 빼! 부드럽게 만들어서 부드럽게 써야 되는 거야.
“제가 좀 고집이 세거든요. 그래서 ‘아! 됐어. 안 해’ 그러는 건 안하는 편이에요. 그때도 그랬죠. 힘은 좋은데 공 던지는 방법을 몰랐던 거예요. 웨이트 트레이닝부터 그때도 지금처럼 운동을 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됐을까, 그런 후회도 종종해요.”
“아쉬움이 많죠. 가만있어도 인대가 끊어져서 공익으로 갔을 텐데, 바보처럼 그때는 ‘내 인생의 쇼부’를 치자 싶었거든요. 공익 가서 퇴근 후엔 캔맥주 들고 매일 밤 한강에서 살았어요. 야구 없는 내 인생, 나는 이제 어떻게 되나…. 그때는 집에도 안 가고 잠실야구장에서 잠도 자고 그랬어요.”
다시 시작할래요
제대하고 2007년 2군에서 노경은은 새 출발을 시작했다.
노경은: 저는 한 것도 없이 벌써 5년차가 돼버렸어요.
김승회: 야야, 괜찮아. 대졸신인이다 생각하고 맘 편하게 다시 시작해.
구자운: 그럼. 이번에 들어온 신인들하고 동기라는 마음으로 해봐.
정성훈: 넌 군대도 갔다 왔잖아. 얼마나 마음 편하냐. 하나도 안 늦었으니까 기운 내라 노경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밝아지더라구요. 형들이 많이 챙겨주셨어요. 이번에 들어온 신인들이 제 동기라고 생각할래요, 진짜루.”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은 노경은은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다가갔다.
“어쩔 수 없었어요. 바보같은 생각만 하고 있으면 뭐가 되겠어요. 긍정적으로! ‘인대도 3번이나 수술해서 바꿨으니까 더 튼튼해지겠구나!’ 팀에 다시 합류해서 스피드 안 나오고 밸런스 안 잡힐 때도 ‘꾸준히만 해보자. 어떻게든 될 거다’ 그러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밸런스를 찾았어요. 그런 가운데 어느날 감독님께서 대구 삼성전 선발로 나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인생도 사랑도 그렇지만 야구도 타이밍이에요. 밸런스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때 등판하라고 해봐요. 또 기회 놓치지…. 저는 운이 좋았어요.”
야구가 축구보다 좋다!
노경은은 사실 홍명보의 플레이에 반해 축구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축구부 테스트를 받기 위해 머리를 자르러 미장원에 들렀다가 인생 항로가 바뀌었다. 아들이 야구 선수로 활약 중이던 미장원 원장이 야구가 축구보다 좋은 수십 가지 이유를 대며 노경은을 설득했던 것. 결국 노경은은 다음날 야구부 테스트에 응하였다.
지난 7월 11일 수요일 노경은의 선발 등판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장맛비가 쏟아지더니 잠실 현대전은 우천으로 순연됐다.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잠을 설친 노경은으로선 하늘이 자신을 도와준다고 믿을 수밖에….
하지만 프로 5년차인 투수 노경은의 승부는 이제 더 이상 미뤄질 수 없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2003년 데뷔 때처럼 화려할 필요도 없다. 조용하지만 강하게, 단단하게 노경은이 부활하기를 바란다.
김은영 MBC라디오 아이러브스포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