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스타전 하루 전날이었던 지난 16일 부산에서 이범호를 만났다. 프로 데뷔 8년 중에 가장 힘든 시즌을 보냈다는 그는 이제 위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방망이는 요물
어느 해보다 운동량이 많았다. 하지만 프로 데뷔 8년 만에 이렇게 힘든 시즌은 없었다. 게다가 클린업 트리오인 김태균과 크루즈에게 얻어맞은 상대 투수들이 더 열을 내 5번 타자인 이범호를 상대하기 때문에 엄청 힘들었다. 김태균과 크루즈가 싹쓸이한 상황에서 거의 테이블세터처럼 등장하는 5번 타자 이범호와 6번 타자 이도형은 서로의 고충을 나눴다고 하는데….
이범호: 저만 그런가요? 요새 방망이가 안 되니까 눈치가 보여요. 사실 우리팀 5번 6번은 거의 마의 타선이잖아요!
이도형: 그렇지. 우리도 타점 올리는 재미가 있어야 되는데 태균이랑 크루즈가 만날 주자들을 다 불러들이니까 영~. 주자가 없으니까 우리 땐 다들 정상 수비잖아.
이범호: 아, 방망이, 요물이에요. 할수록 힘들어!
김인식 감독의 최후통첩
2007년 6월 1일, 대전 삼성전. 0 대 1로 뒤지고 있던 한화의 7회 공격. 1사 1, 3루에서 이범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결과는 허무한 병살타. 그 때문이었을까. 다음날 김인식 감독은 기자들에게 “이범호의 타순을 바꿔야 할 것 같다. 8번까지 내려가면 갈 데 없는데 그렇게 되면 트레이드만 남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6월 3일, 대전 삼성전 3차전에서는 급기야 이범호를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에서 제외시켰다. 이범호의 당시 심경은 이랬다.
“감독님 덕분에 WBC에도 갔고 그로 인해 군 면제 혜택도 받았고, 감독님은 저한테 은인이시죠. 그래도 기사로 그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 나쁘더라구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까, 제 역할을 해줘야 할 선수가 못하니까 그 마음은 어떠실까 싶었어요. 심리적으로 자극 주시려고 그랬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김인식 감독님은 고수죠.”
바닥을 치다
7월 15일, 전반기 마지막 경기이자 서머리그 첫 경기였던 대전 롯데전. 피로 누적으로 김태균과 크루즈가 빠지고 이범호는 5번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6번 타자 이도형은 지명타자. 그리고 터진 이도형의 연타석 홈런과 이범호의 홈런!
이범호: 형. 어제 돼지꿈 꾸셨어요?
이도형: 그런 거 없어^^. 그러는 너는 돼지꿈 꿨냐?
김동주 따라잡기
2007년 프로야구 초반, 이범호의 출사표가 ‘김태균 따라잡기’였다면, 후반기 이범호의 출사표는 ‘김동주 따라잡기’다.
“3루수 경쟁이 장난 아니에요. 두산의 김동주 형, SK 최정까지 다 잘 치는 선수잖아요. 특히 동주 형과 비교되는 건 영광이죠. 솔직히 동주 형 안 좋았던 시즌 두 해에 제가 골든글러브 먹었어요. 올 시즌 끝내고 동주 형이 한국에 있을지 일본에 갈 지 모르지만 동주 형과 경쟁하는 마지막 시즌이다 생각하고 제대로 따라가고 싶어요.”
이범호는 두산 김동주의 파워와 삼성 김한수의 부드러움. 김동주의 파괴력과 김한수의 묵묵함을 갖추고 싶다고 했다.
2000년에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 이범호. 2001년 김태균이 들어왔을 때만 해도 프랜차이즈 2인자는 되겠지 생각했단다. 하지만 2006년 괴물 신인 류현진이 입단하자, 이범호는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꿈을 접었다.
“태균이하고 현진이한테 밀려서 3인자 4인자도 안될걸요? 2009년 시즌 끝나면 태균이랑 같이 FA 되는데 모르죠. 저야 당연히 한화에 있으면 좋겠지만 구단에서 두 명 다 못 잡는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한 살이라도 젊고 또 충남 출신인 1인자를 잡지 않을까요?”
프로 데뷔 비화
고3 시절, 이범호의 모교인 대구고의 1년 성적은 2무 13패. 당시 한화 이글스의 스카우터였던 정영기 현 롯데 2군 감독은 이범호를 2차 1번으로 지명했다. 당연히 다른 스카우터들과 구단에서 난리가 났다.
구단 관계자: 아니, 지방 곳곳을 다니면서 비디오 찍고 흙 속의 진주를 찾자는 건 알겠는데 날고 기는 청소년 대표들 놔두고 듣도 보도 못한 선수를 2차 1번으로 지명하자는 게 말이 돼요?
정영기: 제 자존심을 걸고 뽑고 싶은 선수입니다. 만약에 3년 안에 이범호가 못 크면 제가 옷 벗고 나가겠습니다.
결과는 정영기 당시 스카우터의 승리였다.
아버지와 나
육상선수 출신의 아버지는 전국체전에도 출전한 재능있는 선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다쳐 선수 생활을 끝낸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범호는 언제나 힘이 난다고 한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까지 집이 어려웠어요. 야구하려면 회비도 내야 되고 돈이 좀 있어야 되는데, 그런 부분 때문에 부모님께서 고생하셨죠. 부모님 고생시키면서 하는 야구인데,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지금은 어머님이 그러세요. 너 야구 안 시켰으면 어쩔 뻔했냐구요~^^.”
하지만 경상도 사나이 부자는 하루 30초 통화로 속정을 확인한단다.
아버지: 야~ 오늘 몸 어때? 좋아?
이범호: 네. 괜찮은데요….
아버지: 알았어. 밥 잘 챙기묵고~ 끝!
오래된 꿈 하나
지금은 LG코치로 있는 이정훈 코치가 한화 시절, 이범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정훈: 나는 말이다, 범호야! 고아원 하나 지어서 야구팀 하나 맹그는 게 꿈이다.
그 꿈이 참 멋져보였다는 이범호의 꿈도 야구를 통한 나눔이다. 나중에 대스타가 돼서 뭘 한다기보다 작은 것부터 동네 어린이집에라도 야구공과 글러브를 기증해 평생 야구를 모르고 살 수도 있는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통해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다고 한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이범호는 다시 시작한 프로야구 후반기에 자신의 부진 탈출을 확실히 증명해 보여야 할 것이다.
김은영 MBC라디오 아이러브스포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