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선후배 최용수(왼쪽)와 지인진은 서로가 서로에게 큰 힘이 돼주고 있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일요신문>(7월 15일자, 791호)을 통해 ‘지인진 K-1 진출 확정’이란 기사가 처음 보도되자마자 후폭풍이 상당했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복싱계 선후배들의 반발은 거셌다. 심지어 지인진의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최용수조차 지인진의 K-1 진출을 반대했다. 그 어느 때보다 심한 풍파를 겪은 지인진. 결국 그는 지난 7월 25일, 한국복싱위원회(KBC)에 타이틀 반납서를 제출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글러브를 낀 복싱 인생이 20년 만에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7월 31일, 그들의 ‘나와바리’인 서울 신림동 부근에서 너무나 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지인진과 그런 사연의 비슷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형’ 최용수를 함께 만나 소줏잔을 기울였다.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피해 다니는 지인진에게 ‘편하게 소주나 한 잔 하자’며 운을 뗀 자리였다. 인터뷰를 전제로 한 만남이 아니었기에 오랜만에 만난 최용수도 막상 인터뷰를 진행하려 하자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한 가지. K-1 진출을 발표했지만 아직 K-1 측과 정식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었고 여전히 협상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싱 은퇴와 K-1 진출을 결심하게 된 과정까지만 담아가기로 정리를 했다.
‘보고 또 봐도’ 여전히 인터뷰하기가 쉽지 않은, 그러나 몇 년 새 미운 정 고운 정이 듬뿍(?) 든 최용수와 얼굴 표정이 밝지 않아도 한결 홀가분한 느낌을 전하는 지인진, 두 전직 복싱 챔피언의 현장감있는 ‘취중토크’는 한마디로 희로애락의 축소판이었다.
최용수(최): (지)인진아! 며칠 새 얼굴이 쏙 빠졌다. 자식! 맘 고생 많았지?
지인진(지): 형, 말도 말아요. 잘했다고 제 결정을 지지해준 분들도 있지만 할 말 못할 말 다 해가며 욕한 분들도 많아요. 복싱 쪽도 난리 났거든요. 매니저는 ‘배신자’ 운운하며 법정 소송을 불사하겠다고 윽박지르고, 복싱 선배님들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며 전화를 해주시는데, 이번 일을 통해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어요.
최: 무슨 얘기야?
지: 평소 절 정말 아끼고 걱정하셨던 선배들은 오히려 ‘어려운 결정했다. 힘들겠지만 가서 꼭 성공하길 바란다’며 격려를 해주셨거든요. 그런데 단 한 번도 지인진이란 선수에 대해 관심도, 걱정도 안 했던 분들이 반대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낸다는 사실이죠. 그분들이 제 인생을, 제 생활을 책임져주시는 거 아니잖아요. 아무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 채 복싱 버리고 K-1 가면 안 된다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얘기 아닌가요?
최: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데 뭘….
지: 용수 형, 지난 번에 형 경기 끝나고 마이크 잡은 뒤 제 얘기 하셨잖아요(지난 7월 21일 K-1 칸대회서 최용수가 일본 복싱 미들급 챔피언 출신의 스즈키 사토루를 상대로 KO승 거둔 뒤). 저도 그때 경기장에서 형 얼굴 보고 가슴이 울렁거렸어요. 사실 처음엔 형이 무슨 얘기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카메라가 계속 절 잡길래 ‘아, 내 얘길 하는구나’ 싶었죠.
최: 경기에서 졌다면 그런 이벤트는 하지도 않았을 거야. 경기 전부터 내심 벼르고 있었어. 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데 대해 일격을 가하고 싶었지. 경기에서 이긴 후 멋지게 멘트를 날리고 싶었는데,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은 것 같더라.
(당시 최용수는 경기에서 이긴 후 진행자에게 ‘마이크를 달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일장 연설을 했다. “최근 K-1 진출설이 나돌고 있는 지인진 선수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오죽하면 세계챔피언이 그 자리를 마다하고 격투기 파이터로 전향할 생각을 했겠느냐. 복싱의 전반적인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매니저와 프로모터가 중심이 아닌 선수 중심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복싱과 격투기를 함께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평소 수줍음 많고 말수 적기로 유명한 그가 이처럼 달변가가 돼 관객들을 감동시킨 건 무척 대단한 ‘사건’이었다.)
지: 너무 고맙고 감사했어요. 사실 그때 엄청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어떤 기자 분은 전화를 걸어선 대뜸 ‘복싱 그만두면 안 되잖아요? 세계챔피언이 격투기로 가는 건 잘못된 선택이잖아요?’라면서 막 뭐라하더라구요. 머리가 욱씬욱씬거릴 정도로 아프고 괴로웠어요.
최: 사실 내가 왜 반대했는 줄 알아? 그런 과정을 겪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거든. 난 이미 복싱 은퇴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K-1 간다고 했을 때 난리가 났잖아. 전직 챔피언도 그 정도였는데 현역 챔피언이 K-1 진출한다고 하면 그 후폭풍은 불을 보듯 뻔했거든. 인진이가 그런 걸 겪는 게 싫었고, 무엇보다 복싱이 더 이상 무너지면 안 된다는 간절함 때문에 핏대 세우며 반대했던 거지.
지: 알아요. 그리고 형도 제가 왜 그 모든 저항들을 애써 외면하고 이종격투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는 못 하셨잖아요.
최: 내가 그 마음 너무 잘 알지. 나도 너랑 똑같았으니까….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었어. 가족들이 돈 걱정 없이 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보다 넌 더 힘들었을 거야. 나야 챔피언이라도 오래했지만 넌 그렇지 않았잖아.
▲ 지난해 9월 최용수가 K-1 데뷔전에서 KO승을 거두는 모습(위). 지난해 12월 지인진은 WBC 페더급 세계타이틀을 탈환했다. 연합뉴스 | ||
최: 정말 걱정이야. 지금도 세계챔피언을 꿈꾸며 에어컨도 안 나오는 허름한 복싱체육관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어린 유망주들이 이런 현실을 알게 되면 과연 계속 운동을 하고 싶을지가 말이야.
지: 그 점이 제 선택을 가장 망설이게 한 부분이었어요. 한국의 유일한 세계챔피언마저 K-1에 진출하는 상황을 놓고 어린 후배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 때문에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