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불던 지난 11월 18일 오후 파주트레이닝센터. 옷깃을 여미며 올림픽축구대표팀 취재를 하던 기자들은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박 감독은 귀를 쫑긋 세운 기자들을 향해 전날 원정경기로 열린 우즈베키스탄과의 베이징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5차전에서 졸전을 펼친 선수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어제 전반전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애들을 혼냈어요. 올림픽대표팀 감독 하면서 처음으로 그랬습니다. 요즘 애들은 사명감이란 게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태극마크를 다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는데 이제는 그렇지않은 선수들이 많은 것 같아요. 돈을 많이 벌어서 그런 건지….”
# 다그쳐도 소용없는 강적
박 감독은 한국축구가 과도기를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한국축구가 강압적인 교육에서 자발적인 교육으로 이행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아무리 다그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박 감독의 지적에 많은 축구지도자들이 동의한다. 동북고 최진한 감독도 그중 한 명이다. 최 감독은 ‘준비가 안 된’ 선수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요즘 선수들은 예전과 달라요. 자기주장이 강하고 일방적인 지시를 싫어하는 편이죠. 예전에 우리가 배웠던 식으로 가르치려고 하면 싫어해요. 그런데 문제는 애들이 원하는 식으로 지도를 했는데도 큰 효과를 못 보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사실 자발적인 교육이란 게 듣기는 그럴싸한데 현장에서 적용할 때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있어요. 정신자세나 훈련자세가 뒷받침 안 된 선수들에게 자발적인 교육은 방종을 허용하는 구실밖에 안됩니다.”
선수들도 지도자들의 이런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다. 올림픽대표팀 공격수 김승용(22·광주)은 지난 21일 바레인과의 베이징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6차전이 끝난 뒤 “(2007년 19세 이하 청소년대표팀 출신 선수 중에서) 정신력이 떨어져 보이는 선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올림픽대표팀의 주장 김진규(22·서울)도 “정신력에 문제가 있는 선수는 팀을 떠나야 한다”며 후배들의 정신자세를 꾸짖었다.
물론 신세대 선수들을 탓하기 전에 지도자들부터 각성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에이전트는 신세대 선수들의 보편적인 의식을 전하며 지도자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지난 21일 안산에서 열린 바레인과의 올림픽축구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한국 대표팀이 0-0 무승부로 본선 진출 티켓을 따냈다. 연합뉴스 | ||
# 도발적인 말솜씨 화불러
신세대들의 특징 중 하나가 솔직함이다. ‘사회생활의 법칙’을 아는 기성세대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속마음을 숨길 때 신세대들은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표현한다.
박 감독이 얼굴이 벌겋게 화를 낸 다음날 올림픽대표팀 미드필더 기성용은 자신의 미니홈페이지에 ‘도발적인 글’을 남겼다. 올림픽대표팀의 우즈베키스탄전 졸전에 대한 비난여론에 발끈한 듯 “답답하면 너희가 나가서 뛰던지∼”라고 쏘아붙였다.
지난 8월초 17세 이하 청소년월드컵을 준비하던 윤빛가람(부경고)은 기자들과의 공식인터뷰 자리에서 K리그 비하 발언으로 들릴 법한 얘기를 했다. K리그는 유럽에 비해서 템포가 느리며 수원-서울전을 빼면 볼만한 경기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 5월에는 당시 올림픽대표팀 공격수였던 심우연(FC서울)의 ‘K리그 지방팀 비하발언’이 도마에 올랐다. 팀이 경남에 0-3완패를 당한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에게 얼굴을 맞아 눈 주위를 7바늘이나 꿰맸던 심우연은 미니홈페이지 게시판에 “너네가 아무리 우릴 이기고 설사 K리그를 우승해도 너넨 경남이야 ㅋㅋ”라고 썼다. 별다른 죄책감 없이 신생 지방팀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강진욱(광주)도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지난 2005년 한 인터뷰에서 프랑스 FC 메스에서 한솥밥을 먹은 까마득한 선배 안정환에 대해 “유럽에서는 공격수도 수비에 적극 가담해야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인데, 그런 점에서 메스 팬들이 정환이 형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발언이지만 당시 누리꾼을 중심으로 어떻게 후배가 선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느냐는 비난이 일었다.
▲ 심우연(왼쪽), 강진욱 | ||
기성용의 에이전트인 P&S 얼라이드의 박현준 대표는 “성용이는 대표선수이기에 앞서 평범한 18세 소년이다”며 “아직 나이가 어려 생각 없이 미니홈피에 그런 말을 쓴 것 같다. 팬들께서 너그럽게 용서해주셨으면 한다. 본인도 이번 일로 많이 반성했다”고 말했다.
17세 월드컵 당시 청소년대표팀 주무를 맡았던 대한축구협회 대표팀 지원부 문채현 대리는 “윤빛가람은 알려진 것만큼 건방진 선수가 아니다. 아직 어린 선수라 인터뷰 경험이 많지 않은 탓에 두서없이 말한 게 오해를 일으켰다”고 해명했다.
신세대 태극전사들이 예전 선수들에 비해 사고방식이 다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성과 투혼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는 한국축구에 위기가 왔다고 보는 건 무리다. 박 대표의 말처럼 선수들은 유니폼만 벗겨놓으면 평범한 학생들에 불과하다. 질풍노도 시기의 학생들이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이 되는 것처럼 어린 선수들 역시 갖가지 시행착오를 통해 태극전사로 성장한다.
김진규와 최성국(24·성남)은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 시절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문제아(?)였다. 김진규는 불같은 성격을 주체하지 못해 종종 문제를 일으켰고 최성국은 ‘항명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성인대표를 거치고 인생 경험을 쌓으면서 성숙해져갔다.
대표팀의 막내로 형들과 함께 생활한 김진규는 올림픽대표팀 주장을 맡으며 예전과는 다른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최성국 역시 독일월드컵 출전 좌절 등의 아픔을 겪으며 개인보다는 팀을 생각하는 선수로 거듭났다.
전광열 스포츠칸 축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