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대표팀 허정무 감독(연세대)과 올림픽대표팀 박성화 감독(고려대) 등 국내 축구 지도자들은 여전히 연고대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진은 허 감독이 대표팀 선수들에게 훈련 지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
프로그램 제목으로 나올 정도로 요즘 사회에선 ‘라인’이란 단어가 인기다. 대화 도중 “○○○은 누구 라인이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 다닌다.
인맥과 학연, 지연의 또 다른 표현인 라인. <일요신문>이 축구계의 라인을 살펴봤다.
▶4-4-2
축구인들은 축구계의 권력이 고려대 4, 연세대 4, 한양대 2로 나뉜다는 ‘뼈있는 농담’을 종종 한다. 한국사회의 다른 분야처럼 양대 사학 명문인 고대와 연대가 축구판을 좌지우지하는 가운데 한양대가 ‘제3의 세력’으로 자리한다는 말이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축구대표팀은 고대와 연대 출신 선수들을 주축으로 한 필드플레이어에 골키퍼 1명만 보태면 간단히 선발명단이 짜였다. 이 때문에 축구계 역시 학연주의로 대표되는 ‘패거리 문화’에 젖어 실력보다는 학연과 인맥에 치우친 선수 선발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표팀 구성에 학맥이 작용한다는 지적에 대해 축구협회는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표팀 ‘베스트 11’이 고대와 연대 위주로 짜인 건 두 학교 출신 선수들의 기량이 워낙 출중해 그렇게 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협회의 이런 반박이 논리적으로 공격받은 적이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6월10일 ‘히딩크 리더십의 교훈’이라는 이슈 페이퍼(Issue Paper)를 펴내며 “히딩크는 외국인 감독이기 때문에 학맥이나 인맥과 무관하게 실력 위주로 선수를 뽑았으며, 이 때문에 선수들이 더욱 열심히 뛰었다”고 강조했다.
축구대표팀이 연·고대 출신 선수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던 시절 한국축구는 ‘고대OB’가 주무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고대 출신의 축구협회 실세인 조중연 당시 전무를 정점으로 고대 출신 축구인들이 한국축구의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분석에 대한 반론이 있다. 고대 출신의 한 축구인은 “협회만 놓고 봐도 그렇다. 흔히 축구협회 수뇌부가 고대 출신들로 채워졌다고 생각하는데 정몽준 회장은 서울대 출신이고 가삼현 사무총장은 연대 졸업생이다. 어떻게 고대 인맥이 축구협회를 장악했다고 볼 수 있나”라고 지적했다.
▲ (왼쪽부터) 박성화 감독, 차범근, 김정남, 이강조 | ||
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불과 몇 년 전까지 한국축구는 고대 출신들의 입김에 좌우된 게 맞다”고 증언했다. 정 회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조중연 부회장을 좌장으로 한 고대 인맥이 축구협회와 K리그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이제 상황이 많이 변했다”며 “조 부회장의 2선 후퇴와 가 총장의 사무총장 승진, 연대 출신인 김호곤 전무의 협회 입성으로 권력지도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협회 실무자 중 한양대 출신이 많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며 이회택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한양대 인맥의 부상도 언급했다.
협회 권력의 무게가 분산된 것처럼 최근 한국축구의 전반적인 권력지도도 바뀌고 있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을 제외하고 86년 멕시코대회부터 2002년 대회까지 한국월드컵 대표팀을 거친 선수들의 출신 대학을 분석한 결과, 111명(중복 출전 포함) 중 27명(24.3%)이 고대 출신이었다. 고졸이 13명(11.7%)으로 다음을 차지했고, 연대 출신이 12명(10.8%)으로 뒤를 이었다. 연대와 고대 두 대학 출신을 합하면 39명(35.1%)이나 됐다. 그러던 것이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두 대학 출신 선수가 고대 4명(17.4%)과 연대 2명(8.7%) 등 6명(26.1%)으로 줄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 때는 이 같은 비율이 더욱 줄었다. 연대와 고대 출신이 각각 2명에 불과해 전체 23명 중 4명에 그쳤다. 국가대표 감독을 외국인이 맡았고 2000년 초부터 고교 유망주들이 대학 간판보다는 축구에 대한 열정을 마음껏 불태울 수 있는 프로팀 입단을 택한 결과였다.
▶여전히 연-고대 감독 대세
2005년 프로축구 13개 구단 감독 중 고대 출신이 4명(30.8%)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연대 출신으로 2명(15.4%)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3년이 흐른 지금에도 거의 변화가 없다. 2008년 1월 현재 전체 14개 구단에서 고대 출신 감독은 3명(수원 차범근, 울산 김정남, 광주 이강조)이고 연대 출신 감독은 3명(경남 조광래, 인천 장외룡, 대구 변병주)이다. 3명의 외국인 감독(서울 세놀 귀네슈, 포항 세르지오 파리아스, 제주 아뚜 베르나지스)을 뺀 국내 감독 11명 중 절반이 넘는 6명이 연·고대 출신인 셈이다.
▲ (왼쪽부터) 조광래, 장외룡, 변병주 | ||
▶K리그에 영향 미치는 라인
K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던 한 축구인은 축구계 라인이 꽤 복잡하다고 전했다. 단순한 학맥을 넘어서 지연과 프로생활을 주로 했던 팀을 중시하는 ‘팀 맥’도 있다고 알렸다. “K리그에서 감독을 하려면 학맥과 지연을 총동원하고 믿을 만한 정치인 한 명은 잡고 있어야 한다”며 쓴웃음을 지은 뒤 지난해 겪었던 씁쓸한 일을 전했다.
“경기를 앞두고 주심이 누군가 하고 보니 A였다. B 대 출신이라 상대편 코칭스태프와 동문이라는 생각에 판정에 민감했는데 경기가 끝난 뒤 상대 쪽에서 이렇게 말했다. ‘A랑 현역시절 같은 팀에서 뛰었던 터라 우리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릴 줄 알았다’라고. 모두들 겉으로는 부인해도 라인이니 뭐니 하는 걸 속으로는 의식하는 것 같다.”
한 에이전트도 라인이 축구계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전했다. “C 구단이 대표적인 D 대 라인이다. 구단 고위 관계자가 D 대 출신인데, 한 번 살펴봐라. 그 구단이 최근 5년 동안 영입한 선수들의 출신 대학교를…. D 대에서 공 좀 찼다 하는 선수는 전부 C 구단에 입단했다. 이런 게 바로 축구계의 라인이다.
스포츠칸 축구팀 전광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