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제주 한라체육관에서 남현희를 비롯해 2008베이징올림픽에 출전할 펜싱 대표팀 최병철(27·화성시청) 정길옥(28·강원도청)을 만났다.
남현희는 도쿄그랑프리대회에서 우승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지만 제주에서 열리는 ‘2008제주 SK텔레콤 국제그랑프리 펜싱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베이징올림픽에서 유리한 시드 배정을 받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153cm란 단신에도 불구하고 체격 좋은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칼을 ‘찔러대는’ 남현희는 ‘성형파문’ 이후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며 지난 시간들의 아픔들에 대해 담담히 털어 놓았다. 실제로 남현희는 2006년 그 사건으로 인해 선수 자격정지 2년에서 국가대표 자격정지 6개월로 징계가 완화된 뒤 2006년 한국 펜싱 사상 처음으로 상하이월드컵대회와 도쿄국제그랑프리 대회를 연속 제패했고 도하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하는 등 국제대회에서 주가를 드높였다.
“징계가 풀려 다시 태릉선수촌에 입촌을 했는데 분위기가 굉장히 묘했다. 뭐랄까? 소외받는 느낌이라고 할까? 마치 왕따당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선수들과의 관계가 불편했다. 동료들이 ‘야, 랭킹!’이라고 부를 때(세계랭킹 16위 안에 들 때 일반적으로 선수들은 ‘랭킹’이라고 표현한다. 당시 남현희는 세계랭킹 4위였다) 날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건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구분이 안 갈 만큼 혼란스러웠다. 징계가 풀린 건 다행이었지만 대표팀 생활에 적응하는 데 너무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한 탓에 펜싱 자체가 싫어지기도 했다.”
2005년 라이프치히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플뢰레 단체전 우승의 주역이었던 남현희에게 2006년이 아픔과 감동을 준 한 해였다면 2007년은 수렁에 빠진 최악의 1년이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도무지 성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 외적인 모든 사생활을 포기하고 오로지 펜싱에만 매달렸는데도 대회에 나가면 성적이 안 나왔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부분 8강에서 탈락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8강을 넘어서 4강에만 올라도 메달권에 진입할 수 있는데 꼭 8강에서 미역국을 먹으니까 정말 힘들었다.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다 보니까 운동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남현희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은퇴 여부를 고민했었다고 토로했다. 대표팀 내부 사정에 의해 올림픽 3개월을 앞두고 코치들이 전격 교체되고 새로운 코치와 호흡을 맞추는 상황에서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 단신 핸디캡을 극복하고 세계 무대에 우뚝 선 남현희가 금메달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 ||
도쿄대회에서 세계랭킹 3위의 자격으로 시드 배정을 받은 남현희는 8강에 오르기 전 두 차례 연속 한국 선수들과 겨루는 상황이 연출됐다. 그 중 한 사람은 이번 베이징올림픽에 같이 출전하는 선배 정길옥이었다.
“처음엔 마음 비우고 부담없이 시합을 하려고 했는데 (정)길옥 언니가 예상외로 세게 나왔다. 언니가 승부욕을 내니까 나도 저절로 반응을 하게 되더라. 그래서 치열하게 싸웠다(웃음). 결국 길옥 언니를 이김으로써 8강을 거쳐 결승까지 갔고 독일의 카롤린 고르비츠키를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펜싱 여자 플뢰레에서 최고의 선수는 이탈리아의 발렌티나 베잘리(세계랭킹 1위)다. 지난 중국대회에서 베잘리와 4강에 만나 패했는데 이번에 베잘리를 꺾고 결승에 오른 고르비츠키를 내가 이겼다. 도쿄대회에서 우승직후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 대회가 올림픽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국대회에서 베잘리와 맞붙을 당시 남현희는 ‘도대체 베잘리가 얼마나 잘하기에 ‘펜싱의 명인’라고 할까’ 하는 호기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붙어 보니까 왜 베잘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 절감했다는 것.
“초반엔 터프하게 밀어붙였지만 중반을 넘어서니까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경기를 풀어가는 노련함이나 과감성 등에서 베잘리에 비해 부족함을 느꼈고 내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게임이었다. 34세의 나이에 주부라는 타이틀까지 달았으면서도 도도하게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베잘리가 너무 부러웠다. 이번 올림픽에서 내가 넘어야 할 산은 단 한 명, 베잘리다.”
남현희는 작은 키에 대해 한이 많다고 솔직한 심정을 나타냈다. 이전엔 ‘땅콩’이란 별명을 사랑했지만 국제대회를 치르면 치를수록 10cm만 더 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한두 번 든 게 아니라고 한다. 워낙 장신들을 상대하다보니까 체력적인 부담이 몇 배는 더 가중된다는 것.
“어느 누가 그런 말을 하더라.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에서 주는 거라고. 이번 올림픽에선 그 하늘의 행운이 나한테 주어졌으면 정말 좋겠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화려하게 대표팀에서 은퇴하는 게 최고의 소원이다.”
펜싱계의 유명한 공식 커플인 남현희는 남자친구 원우영(27·서울메트로)과 베이징올림픽 이후 ‘결혼’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기로 약속했다며 환하게 웃는다.
제주=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