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고 경기력을 자랑하는 쇼트트랙도 국가대표 선수들이 출신학교 별로 나뉘어 훈련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로이터/뉴시스) | ||
#윤동식 - 추성훈 - 이원희
윤동식은 최근 파이터로 화려한 제2의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꽃미남 유도스타로 국제대회 47연승의 신화를 이룬 그에게는 가슴 한켠에 시커먼 멍이 하나 있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화려한 유도인생에 유독 올림픽 출전이라는 경력만 빠져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기량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한국 올림픽대표선발전에서는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말이 좋아 ‘비운의 스타’지 실은 학연에 따른 파벌의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 유도계의 정설이다. 한국 유도계는 용인대(구 유도대) 천하인데 윤동식은 한양대를 나왔다. 유도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윤동식이 협회 고위층, 심판 등 용인대 인맥에 의해 무너졌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이 떠돈다. 공공연히 유도의 파벌은 이처럼 세계 최고 기량도 비운의 스타로 전락시킬 만큼 위력적이다. 격투기 무대에서 데뷔 초기 고생했지만 현재 최고의 ‘우량주’로 평가받고 있는 윤동식은 사석에서 “격투기는 파벌이 없어서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5월 7일 ‘한판승의 사나이’ 이원희는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용인대 후배 왕기춘에게 져 한국의 사상 첫 올림픽 2연패라는 꿈을 접었다. 둘 다 용인대인데 무슨 파벌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는 보다 세분화된 형태의 파벌 논쟁이다. 용인대를 나온 이원희는 마사회 소속이다. 반면 왕기춘은 현재 용인대에 재학 중이다. 재학생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학교 측으로서는 더 이상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 승자 왕기춘도 인정할 정도로 편파판정 논란이 불거졌는데 용인대 파벌은 OB와 YB 사이에도 적용될 정도로 막강하다는 평이다.
앞서 이원희는 추성훈의 발언에 대해 “유도에서 파벌(용인대를 지칭) 운운은 스포츠맨답지 않다”고 말했다가 네티즌의 항의성 댓글이 이어지자 급히 해명한 바 있다. 이런 이원희마저 특정 세력의 판단에 의해 희생됐다고 하니 아이로니컬하기만 하다.
#파벌은 모든 종목에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유도는 크게 용인대 VS 비용인대의 대립으로 파벌싸움이 펼쳐진다. 특정 집단의 세력이 일방적으로 우세할 경우 ‘비(非) 세력’이 하나로 뭉쳐지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파벌 문제가 비단 유도뿐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한체육회 산하 거의 전 종목에 내부 파벌 다툼이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형태와 내용은 좀 다르지만 어느 스포츠단체건 파벌이 있고, 그로 인한 내홍이 있다는 것이다.
2006년 간판스타 안현수의 부친이 협회 고위층을 공개적인 자리(공항 귀국장)에서 멱살잡이를 해 그해 10대뉴스에 선정될 정도였다. 안현수의 모교인 한체대와 비한체대의 대립구도인데 똑같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대표팀 선수들이 출신학교 별로 나뉘어 훈련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심지어 선수들은 국제대회에서 협력이 아니라 한국선수간의 견제로 인해 넘어지고 실격되는 등 어처구니없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탁구는 파벌다툼으로 인해 최근 주요 실업팀이 국내실업대회를 보이콧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천영석 회장을 중심으로 한 회장파 VS 비회장파의 세 싸움인데 이제 내부 전투를 넘어 전면전을 치르고 있다. 회장 탄핵을 위한 기자회견, 촛불집회 등이 벌어졌고 이에 회장파는 반대파에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며 강공책으로 맞서고 있다. 회장파가 협회를 장악하자 반대파는 실업탁구연맹을 중심으로 뭉쳐 협회장을 놓고 노골적인 전쟁을 펼치고 있다. 이 같은 대립구도는 수십 년째 계속돼온 뿌리 깊은 것이다. 한 실업팀 지도자는 “다 같은 선후배들인데 솔직히 안타깝다. 탁구계가 사과 두 쪽 나뉘듯 갈라진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제는 한 쪽이 이기면 다른 한 쪽은 패하는 제로섬 게임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에 편승하지 않으려 해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자칫 금을 밟거나 왔다갔다 하면 탁구계에서 연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육상은 많은 세부 종목만큼이나 파벌대립도 다양하다. 장거리의 경우 고교명문 배문고를 중심으로 한 동대문파와 한체대가 중심이 된 잠실파, 즉 서울의 남북대립 형태를 띠고 있고 기타 종목은 시도육상연맹 즉 지역간의 대립이나, 건국대 한양대 한체대 등 대학들 세다툼이 복합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배구는 한양 성균관 경기 등 명문 사립대 파벌이 강하고, 남자프로골프는 원로그룹과 회장파가 각각 SBS와 금호아시아나그룹을 후광으로 삼아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태권도는 경희대와 비경희대, 핸드볼은 경희대 VS 한체대, 펜싱은 한체대 VS 비한체대로 나눠진다. 배드민턴의 경우 김학석 협회부회장이 워낙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어 친반 양쪽으로 구분된다.
▲ 왼쪽은 비운의 파이터 추성훈(연합뉴스).오른쪽 올림픽 출전권을 잃은 이원희를 둘러싸고 파벌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 | ||
파벌 대립은 지도자 및 선수 선발, 그리고 해당 단체 임원 선출 등 인사문제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파벌은 인사 때문에 생겨나고 또 인사로 인해 더 굳어지는 것이다. 파벌이 심했던 한국 태권도를 하나로 뭉쳐 올림픽 종목으로 키워낸 김운용 전 IOC위원은 “어떤 분야든 사람들은 친소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는 외국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인사로 인해 갈등으로 표면화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태권도나 대한체육회 등 국내외 스포츠단체 수장을 맡았을 때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권력을 쥐고 있는 특정 파벌이 인사를 독식하면 그 반대파는 그 만큼 피해를 보게 된다. 상황이 역전되면 복수는 뻔하다. 페어플레이 정신이 가장 중요한 스포츠에서는 더욱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파벌과 관련해 많이 언급되는 것이 2002년 월드컵 때의 ‘히딩크 철학’이다. 히딩크는 선수 선발 때 학연 지연 등 기존 국내 축구계 관행을 깨고 오직 실력으로만 선수들을 뽑아 ‘4강 신화’를 달성했다. 히딩크 이전에는 협회 집행부, 대표팀 지도자들의 인맥에 따라 뽑힐 선수가 탈락하고, 탈락할 선수가 뽑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스포츠계 파벌 난맥을 해소할 좋은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종목의 국가대표 감독을 외국인에게 맡길 수도 없고, 더욱이 경기단체 임원은 말할 필요가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집권을 하든 도를 넘는 코드인사를 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사람을 쓰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이것이 지나칠 경우 없던 파벌도 생길 수 있다. 한국스포츠는 현재 경기장 내에서의 페어플레이는 물론, 경기장 밖의 페어플레이도 중요한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t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