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모습. 연합뉴스 | ||
그들만의 중화민족주의
제29회 베이징올림픽은 외견 상 훌륭했다. 신흥 경제대국답게 웅장한 하드웨어에 첨단장비, 그리고 최대 170만 명에 달한다는 자원봉사자까지 모든 면에서 역대 최고 최다라는 이번 올림픽은 제법 매끄럽게 진행됐다. 우려했던 티벳 유혈사태 관련 시위나 올림픽 현장에서의 테러도 없었다. 여기에 13억 인구의 중국이 금메달을 무려 50개나 휩쓸며 종합 1위에 등극한 것은 중국 당국이 미리 짜놓은 ‘위대한 중화’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쪽이 커질수록 다른 쪽은 작아지기 마련이다. 개막전 역대 최장거리 성화 봉송(13만 7000km)은 티벳 관련 항의 시위로 세계 곳곳을 돌며 난장판을 연출하더니 개막식은 베일을 한풀 벗기자 사상 초유의 ‘짝퉁 개막식’으로 눈총을 샀다. 그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인해 “역시 장이머우 감독”이라는 찬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불꽃놀이 거인 발자국’이 컴퓨터그래픽이고, 소녀가수 린먀오커가 립싱크를 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여기에 성화점화자인 리닝은 ‘나이키 아디다스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정부가 미는 스포츠브랜드 리닝(짝퉁 이미지가 강하다)을 홍보하기 위한 조치’라고 해석돼 짝퉁으로 시작해 짝퉁으로 끝난 개막식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중국은 선수마저도 짝퉁 시비에 휘말렸다. 여자체조 금메달리스트인 허커신이 당초 중국이 주장한 16세가 아닌 14세라는 증거가 속속 공개되며 금메달 박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렇듯 중국의 독주에 서양 언론은 “올림픽이 재미없어졌다”거나 ‘인구나 경제력 대비 메달집계’라는 새로운 통계를 내세우며 애써 슈퍼 차이나를 부정하기도 했다.
펠프스 ·류샹·볼트
베이징에서 물의 황제는 마이클 펠프스(23·미국)였고, 땅의 지배자는 단연 우사인 볼트(22·자메이카)였다. 둘의 실력과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했다.
펠프스는 8개의 금메달을 따내 72뮌헨올림픽에서 ‘수영의 전설’ 마크 스피츠가 달성한 7관왕을 뛰어넘었다. 7개의 세계신기록을 양념으로 쳐 단일대회 8관왕은 더욱 빛났다. 하지만 대회막판 0.01초차로 우승한 100m 접영에서 자신의 후원사인 오메가에 의한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이 미국 언론, 그것도 가장 권위있는 <뉴욕타임스>로부터 제기돼 찜찜함을 남겼다.
반면 볼트는 완벽에 가까웠다. 남자 100m와 200m, 그리고 400m 계주까지 눈부신 역주로 세계신기록 3관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선더볼트’라는 닉네임을 얻은 볼트의 선전은 미국 육상 단거리의 몰락과 대조되며 최고의 화제를 낳았다.
▲ 육상 200m 결승에서 우승한 볼트(위)와 수영 100m 접영 결승에서 우승한 펠프스. 로이터/뉴시스 | ||
한국 얻은 것과 잃은 것
한국은 베이징에서 정말 얻은 것이 많다. 세계신기록 5개와 함께 세계를 들어올린 ‘여자 헤라클레스’ 장미란, 72년 만에 남자수영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따낸 ‘마린보이’ 박태환, 경기마다 명승부를 연출하며 세계야구사를 새롭게 쓴 국가대표 야구팀, 태권도 남매의 사상 첫 금메달 싹쓸이(4개), 배드민턴의 ‘윙크남’ 이용대 등 자랑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다. 자랑스런 금메달 외에도 ‘여자핸드볼 감동의 동메달’ ‘이배영의 투혼’ ‘39세 이봉주의 39번째 완주’ 등 가슴이 뭉클한 순간도 많았다. 여기에 종합 순위에서도 당초 목표로 했던 ‘10(금메달)-10(종합순위)’을 가볍게 넘겼으니 대한체육회가 어깨에 힘을 주고 25일 대대적인 범국민환영행사를 벌였을 법도 하다.
하지만 내시경을 들이대면 속상한 것이 많다. 일단 이번 올림픽에서 남북한은 1990년 남북체육교류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이후 가장 냉랭한 관계를 전세계에 보여줬다. 당초 동시입장을 넘어 사상 첫 종합대회 남북단일팀, 그리고 심지어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한민족 열차응원단까지 거론됐지만 올 초 정권교체 후 정치적 대립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베이징에서 체육회담은 물론이고 실무자 접촉도 없었고 가장 쉬운 합동응원도 이뤄지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이 이번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가장 가까운 강대국인 중국 내에 반한감정을 고착시켰다는 점이다. 개막식 때 한국선수단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올림픽 기간 내내 종목을 가리지 않고 경기장에서는 유독 한국선수들에게만 집중적인 야유가 쏟아졌다. 중국이 갖고 있는 대국의 자존심, 동북공정에 대한 역사논란, 중국 내 한국기업의 야반도주 등 사회문제 등이 저변에 깔려있고 쓰촨 대지진 때 한국 네티즌의 비방과 SBS TV의 개막식 리허설 공개 파문 등이 더해지며 반한은 혐한으로까지 발전됐다.
▲ 쿠바의 마토스(왼쪽)가 23일 태권도 동메달전에서 자신의 패배가 선언된 뒤 심판인 첼바트의 안면을 발로 차고 있다. AP/연합뉴스 | ||
우리만의 잔치 태권도
한국 태권도는 출전한 4체급에서 금메달을 싹쓸이하며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다. 여기에 ‘태권영웅’ 문대성이 눈물 나는 ‘나홀로 선거운동’으로 전체 1위로 동양인 첫 선출직 IOC 선수위원 당선이라는 쾌거를 더했다. 이 기간 중 ‘한국 태권도의 대부’인 김운용 전 IOC 위원이 이명박 정부로부터 복권을 받아 태권도를 넘어 스포츠외교에 탄력을 받게 됐다.
하지만 정말이지 끔찍한 최악의 불상사가 발생했다. 20일 대회 첫날부터 외신들이 태권도의 판정시비를 지적한 가운데 23일 마지막 날 사상 초유의 심판폭행과 판정번복, 그리고 관중난동 등 최악의 사태가 잇달아 터져 나왔다.
세계태권도연맹(WTF)이 성공적인 올림픽이라며 축하파티를 열었지만 국내에서도 이 문제가 포털사이트 검색 1위에 오르고 전 세계 유수의 언론이 올림픽 종목 태권도의 공정성을 비난하는 지경에 처했다. 주요 외신은 심판을 향해 발차기를 하는 쿠바 선수의 엽기적인 사진과 함께 ‘태권도 불만의 폭풍 야기’ ‘음모로 가득찬 올림픽 태권도’ 등 태권도의 부정적인 요소를 집중 부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년 IOC 총회에서 2016년 올림픽 참가종목 선정 투표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은 가운데 태권도가 큰 위기를 피할 수 없게 됐다는 분석이다.
베이징=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