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전은 현재 제52기 도전 5번기가 진행 중이며 타이틀 보유자 이세돌 9단이 도전자 목진석 9단에 2 대 1로 앞서고 있다. 그런데 제53기 개최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후원사 쪽에서 계속 후원을 할지 어떨지 결정을 못하고 있다는 것. 올해에는 경제가 더 어려워질 거라고들 하니 주최사나 후원사의 고충도 이해가 되지만 전통의 국수전이 중단된다는 것은 바둑계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바둑계나 바둑팬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전통의 기전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국수전은 한국 현대 바둑의 상징이며 산맥이다. 조남철 김인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 이세돌 등 한국이 낳은 불세출 기사들의 발자취가 거기에 있다. 한국 바둑이 오늘날 세계 최강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공로라 할 수 있다.
왕위전은 2007년 7월, 이창호 대 윤준상의 제41기 도전 5번기에서 이 9단이 3승 2패로 타이틀을 방어, 통산 12연패의 대기록을 수립한 것을 끝으로 중단된 상태다. 왕위전은 국수전보다 출발은 한 걸음 늦었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 상금 규모에서 랭킹1위 기전으로 한국 바둑 중흥을 선도했었다.
1989년 <세계일보>가 창간과 함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억 원의 예산을 책정, 신문기전 억대 시대의 문을 열면서 일약 한국 랭킹 1위의 기전으로 화려하게 돛을 올렸던 기성전도 2008년 5월 제19기 도전 3번기를 끝으로 중단된 상태. 제19기에서는 타이틀 보유자 박영훈이 백홍석의 도전을 2 대 1로 물리치며 타이틀 4연패에 성공했다.
신문기전의 쇠퇴는 몇 년 전 국수전 왕위전과 함께 한국 7대 신문기전이었던 국기전 패왕전 최고위전 등이 차례로 막을 내리면서 이미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 무렵에는 전통의 기전들이 사라지는 대신 십단전(원익배) 물가정보배 전자랜드배 등 새로운 기전이 생겨나 서운함을 달랠 수 있었지만 국수전과 왕위전의 경우는 그 상황과 의미가 또 다르다.
명인전은 중단 위기에 놓였다가 ‘하이원’이라는 굴지의 후원사를 만나 전화위복, 국내 최대 기전으로 성큼 올라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국수전 왕위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혹시 없을까.
어쩔 수 없이 일본과 비교가 된다. 일본 바둑은 요즘 세계무대나 국가 간의 대결에서는 힘을 전혀 못쓰고 있지만 그래도 기전은 변함이 없다. 일본이 주최하는 세계기전도 마찬가지다. 후지쓰배는 초창기 몇 년을 빼고는 해마다 한국과 중국, 특히 한국이 거의 타이틀을 가져가고 있지만 대회를 중단한다거나 규모를 축소한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우리 같으면 아마 진작 없어지지 않았을까.
경제 사정이 꼭 변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일본도 10년 가까운 불황의 터널이 있었으나 그때도 기전을 없애거나 축소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세계무대에서 연전연패하는 일본은 기전들이 건재한데, 언필칭 세계 최강이라는 한국 바둑은 최고(最古)의 기전들이 비틀거리고 있다. 국수전과 왕위전의 중단은 한국 현대 바둑사의 단절이다. 가슴 아프고, 한편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중에 지난 연말에 재미있는 기전이 하나 생겼다. 스카이(SKY)바둑배 시니어연승대항전. 지난 12월 29일 한국기원대회장에서 만 45세 이상 68명의 기사가 참가한 가운데 개막식과 1차예선전이 있었다. 여기서 14명이 본선에 올라가면 7명씩 두 팀으로 나뉜다. 각 팀에는 이름이 붙는다. 하나는 국수팀, 다른 하나는 명인팀. 국수팀 주장은 조훈현 9단, 명인팀 주장은 서봉수 9단이다. 두 사람은 예선을 거치지 않는다. 그래서 팀당 8명이 농심배나 지지옥션배와 같은 방식의 승발전을 벌인다. 국수-명인의 1번 주자가 나와 겨루어 이긴 사람은 다른 팀의 2번 주자, 또 이기면 3번 주자…. 조훈현과 서봉수.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우리 바둑사의 중흥기를 꽃피웠던 희대의 라이벌. 두 사람은 공식대국만 361국을 두어 243(조훈현) 대 118의 스코어를 기록했다. 타이틀전에서만도 68회 격돌, 55(조훈현) 대 13의 전적을 남겼다. 대회 규모는 1억 1000만 원. 우승상금은 5000만 원. 3연승을 하면 200만 원의 포상금을 받으며 거기서 더 이기면 1승당 100만 원이 추가된다.
조훈현과 서봉수는 이렇듯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새로운 전장에서 만나는데 그 중에서 34년 전 조훈현이 몸을 일으켰던 국수전은 전도가 흐릿하며 순국산 풍운아 서봉수를 탄생시키며 장안의 지가를 높였던 명인전은 기사회생의 또 다른 드라마를 보여 주고 있다. 서봉수 9단의 명인팀이 이기려나.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