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실만 5000개가 넘어 호텔 한 층에서도 길을 잃는다는 라스베이거스 MGM그랜드호텔. 그 위용은 물론이고 분위기도 대단했다. UFC의 본거지답게 그야말로 축제분위기였다. 호텔입구와 프런트데스크는 물론이고 심지어 카지노 내부의 테이블 위까지도 펜-생 피에르의 홍보 포스터가 도배돼 있었다.
호텔에서 무작정 3시간을 기다린 끝에 늦은 저녁을 먹고 밤 10시께 들어온 김동현을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이 늦었기에 인사만 하고 나올 참으로 김동현의 방으로 갔는데 김동현은 고교선배인 한 의사로부터 컨디션 조절을 받는 중이었다. 덕분에 한 시간 정도 편안한 분위기에서 얘기를 나눴다.
김동현은 “앞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싶을 정도예요. 훈련을 너무 잘했거든요. 감량도 저절로 됐고, 컨디션이 너무 좋아요”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김동현은 말뿐이 아니라 표정, 그리고 몸 상태도 정말 좋아보였다(앞서 2연승을 거둔 김동현은 UFC 데뷔전을 이곳에서 치른 바 있다). 낮에 열린 계체량 때 대전 상대인 파리시안을 봤는데 표정이 극히 어두웠다”는 소식도 전했다.
다음날은 빨리 갔다. 김동현은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체력과 파워를 끌어올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탄수화물 음식을 섭취하면서 컨디션을 조절했다. 그리고 다크매치(중계방송이 안 되는 경기) 시작 시간인 5시께 김동현 등과 함께 최대 2만 석이라는 MGM그랜드아레나로 향했다.
경기장은 크고 깔끔하고, 또 화려했다. 화질이 뛰어난 대형 멀티비전 6개가 경기장 상단에 걸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자세히 경기를 비춰줬다. 늘씬한 라운드걸이 옥타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밖을 빙빙 도는 것도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관중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해 메인매치가 시작되는 7시께 만석이 됐다. 기자석은 옥타곤의 한쪽 측면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앞에서 3 번 째 열에 앉았는데 옥타곤과의 거리는 불과 5m였다.
경기내용은 예상보다 흥미가 떨어졌다. 이날 UFC94는 역사상 처음으로 8경기 연속 판정이라는 진기록이 나왔다. 다크매치 5경기와 이어진 메인매치 3경기가 모두 판정까지 이어졌다. 다행히 마지막 두 경기에서 화끈한 KO(혹은 TKO)가 나왔다. 다크매치가 끝난 후 도전정신을 발휘해 김동현을 찾아 라커룸으로 향했다. 하지만 중간에 스태프들이 방송 카메라 외에 일반 기자들은 절대 라커룸으로 갈 수 없다고 제지했다. 그래서 급히 전날 인사를 나눴던 UFC 최고위층 ‘미스터 빈’을 찾아 기념셔츠를 뇌물로 주는 등 기분 좋게 부탁을 했다. 그러자 ‘빈’이 직접 손을 잡고 김동현의 라커룸까지 나를 안내했다.
기자석으로 돌아와 김동현의 경기를 봤는데 결과는 이미 잘 알려진 대로였다. 1라운드는 우세했지만 2, 3라운드는 팽팽했거나 오히려 김동현의 열세였다. 무승부면 딱인데 UFC가 좀처럼 무승부 판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1점차 1-2 판정패. 관중석에 “우”하는 야유가 크게 터져 나올 정도로 김동현이 확실하게 진 경기는 결코 아니었다. 서운함에 다음 경기는 제쳐두고 김동현의 라커룸으로 향했다.
김동현은 아니나 다를까 크게 실망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지, 정말 모르겠네. 체력이 달린 것도 아닌데 왜 더 적극적으로 못했지. 뭐가 씌었나. 죄송합니다….” 별로 말이 없는 편인 김동현은 그렇게 혼잣말을 연신 내뱉고 있었다. 다행히도 얼굴이나 몸 어디에도 부상이 없었다. 멍 하나 든 곳이 없어 언제 경기를 하고 내려왔나 싶을 정도로 멀쩡했다. 그런데도 졌다니 더욱 안타까웠다.
김동현의 예상치 않은 석패 덕분에 펜-생 피에르 경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계속 라커룸에서 김동현을 위로했다. 이 사이에 UFC TV가 ‘진 선수는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며 인터뷰를 요청했고 김동현은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재무담당 직원이 출전료를 수표로 주고 갔다(이러니 한국처럼 대전료를 못 받는 사고는 있을 수가 없다).
원래는 김동현과 밤새 승리 축하 파티를 하며 24시간 동행취재를 마무리하기로 약속했지만 아쉬운 패배 탓에 김동현이 가까운 선후배들과 편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뒤늦게 링사이드 기자석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UFC에 취해 저녁도 먹지 못했다. 결국 기자실 TV로 말썽 많은 ‘미끌미끌한’ 생 피에르의 승리를 지켜봤다. 김동현만 이겼으면 모든 것이 좋았을 첫 UFC 취재였다.
라스베이거스=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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