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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7일 전북 임실군민회관에서는 이 고장 출신인 김지영 IFBA(국제여자복싱협회) 슈퍼플라이급챔피언의 방어전이 열렸다. 상대는 태국의 덴나파 룩사이콩딘. 5전 5패의 전적에 IFBA랭킹에도 올라 있지 않은 ‘이상한’ 선수였다. 경기에 앞서 수준 이하의 선수가 세계타이틀전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고, 한국권투위원회(KBC)는 경기 당일 선수이름을 삭룽루앙으로 소개했고, 전적과 랭킹도 9승5패에 랭킹 6위라고 소개했다. 경기 결과는 김지영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5회 KO승을 거뒀다. 세계 챔피언이 거둔 생애 첫 KO승이었다.
KBC(한국권투위원회)와 대회주최측은 ▲삭룽루앙은 닉네임으로 예전 한국시합 때 이미 사용한 바 있고 ▲전적과 랭킹은 해외사이트가 업데이트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나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우기는 힘들었다. 2006년 10월 제주경기에서 ‘가짜 선수 사건’이 벌어진 한국 여자프로복싱이기에 의구심은 더욱 강했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프로복싱도 관장하는 KBC는 여자복싱의 혼탁상을 부인하지 않았다. 2001년 이인영이 한국의 첫 여자프로복싱 세계 챔피언(IFBA 플라이급)이 되고, 입양아 출신의 한국인 킴 메서가 소개되면서 여자복싱 붐이 일었지만 이후 지금까지 엉터리 역피라미드 구조가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현철 KBC 홍보부장은 “여자복싱은 아마추어에서도 아직 올림픽 종목이 되지 못하는 등 정착하지 못했다. 권위 있는 국제기구나 국가협회에서 이를 공식경기로 인정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생긴 것이다. 각종 문제의 심각성이 극에 달한 만큼 KBC도 앞으로 재정비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자복싱은 쉽다. WBA(세계복싱협회) WBC(세계복싱평의회) 등 세계 양대기구에 IBF(국제복싱연맹) 등 오랜 역사를 가진 권위 있는 국제기구가 있기 때문이다. WBO WBF 등 유사기구도 있지만 확실한 변별력이 있다.
현재 KBC가 인정하는 여자복싱기구는 WBA와 WBC, 그리고 IFBA 3개뿐이다. 여자복싱만 놓고 보면 IFBA가 가장 오래됐고, WBC WBA 순이다. WBC는 ‘WBCF’라고 부르고 WBA는 ‘WBAfemale''로 호명한다. 유럽이 강세인 WIBF, WIBA 등의 단체도 있지만 KBC는 기구의 난립을 막기 위해 이를 막고 있다(실제로 2008년 5월 WIBF의 가입신청을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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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먹이 운다’ 지난 2월 17일 열렸던 김지영의 IFBA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방어전. 상대 선수가 무명이었던 탓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이인영(왼쪽) 최현미 선수. | ||
이 중 김주희와 손초롱은 소속 프로모터가 KBC에 대항해 새로 생긴 KBA(한국권투협회)로 이적하는 바람에 세계 챔피언이면서 KBC로부터는 공인받지 못한 ‘애매한 상황’에 놓여 있다.
반면 한국 챔피언은 단 2명에 불과하다. 플라이급의 전일림과 슈퍼밴텀급의 배미란이 ‘유이’하다. 나머지는 공석이다. 빈자리는 6체급의 5위까지 발표되는 랭킹에도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다. 총 21명이 랭커로 등록됐지만 실제 현역으로 활동하는 선수는 15명 안팎이라는 것이 KBC의 설명이다.
어쩌다가 이런 괴상한 구조가 됐을까. 최현미를 지도하는 김한상 관장은 “남자는 한국타이틀매치나 동양타이틀매치를 한다면 흥행이 되지 않는다. 한국 정서에서 세계타이틀은 돼야 스폰서나 방송을 구하는 등 최소한의 흥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세계타이틀을 국내에서 하기 힘든 반면 아직 한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선수층이 얇은 여자복싱은 쉽게 세계타이틀매치를 할 수 있다. 그러니 프로모터들이 여자선수의 경우 어느 정도 스텝을 밟는 등 그림이 나오면 바로 세계타이틀매치를 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팬들도 눈높이가 있다. 처음에는 신선함에 관심을 모을 수 있지만 내실이 없는 경기가 계속되니 여자복싱이 외면받게 되는 것이다. 북한은 여자복싱 세계 최강국에 속하는데 2007년 10월 개성에서 한국의 세계 챔피언들이 북한 여자선수들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진 것이 아주 좋은 사례다. 무엇보다 권위 있는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여자복싱의 질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여자복서들의 처우는 어떨까. 4차방어에 성공한 우지혜 등 최고 수준이 경기당 2000만 원을 받고, 보통은 1000만 원 수준이다. 명색은 세계 챔피언으로 좋지만 수입은 평범한 직장인보다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스폰서가 있으면 그나마 도움을 받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세계 챔피언이 각종 아르바이트를 해야한다. 실제로 IFBA 밴텀급 챔피언을 지낸 김은영은 타이틀방어전을 준비하면서 낮에는 PC방 점원, 밤에는 바텐더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런 생활고는 은퇴 후로도 이어진다. 벌어놓은 돈이 없고 운동을 하느라 기술이나 학업을 쌓은 게 없으니 고된 삶을 살기 십상이다. 초대 챔피언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이인영은 현재 트럭운전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패션잡지에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던 전 세계 챔피언 최신희도 예전 자신이 속했던 프로모션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럼 여자복싱의 미래는 암담하기만 한 것일까. 복싱전문가들은 “더 나빠질 것이 없다. 오히려 남자보다 시장이 더 좋다”라고 기대하고 있다. 남자복싱은 올림픽종목인 아마추어라는 든든한 뿌리를 갖고 있다. 현재 복싱은 올림픽 26개 종목(런던 기준) 중 유일하게 남자만 참가한다. 이에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AIBA)은 지난 2월 19일 여자복싱의 2012년 런던올림픽 종목채택을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종목 신청을 하자는 데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면 저변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가 되고, 이것이 여자 프로복싱 활성화에도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IOC는 오는 10월 코펜하겐 총회에서 여자복싱의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이웃 일본은 2008년 5월 JBC(일본권투위원회)가 여자복싱을 승인한 후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 이전에는 프로모터 한 명이 여자 프로복싱을 담당했지만 철저한 검증시스템과 함께 이를 흡수하면서 프로복싱 중흥의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이제 한국도 여자복싱을 단순한 눈요깃거리가 아닌 제대로 된 ‘프로스포츠’로 육성할 때가 됐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