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잉창치배는 몇 가지 특징으로 고유의 브랜드 가치를 자랑하는 세계대회다. △세계 최초의 국제기전 △기업이 아닌, 바둑을 너무도 사랑했던 한 개인의 열정과 헌신으로 탄생된 대회 △독자적인 룰과 진행방식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 등이다.
잉창치는 몇 년 전에 아흔 가까운 나이에 작고한 대만 거부의 이름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재벌이었는데, 바둑은 최고의 도락이요 지적 게임인데, 그 바둑의 종주국은 중국이라는 신념으로 거액의 사재를 쾌척해 바둑을 연구하게 했고, 룰과 용구를 세계 각처에 무상으로 뿌렸으며 1988년에는 마침내 바둑 세계 최고수들의 경연장을 만드는 등 말년에는 사업보다도 바둑에 올인하면서 세계적 명사가 됐던 사람이다.
현행 바둑 룰은 네 종류. 한·중·일에 대만을 포함한 동양 4강의 것이 조금씩 다르다. ‘전만법(塡滿法)’이라 불리는 대만 룰은 잉창치가 연구-보급한 까닭에 잉창치룰로도 통용된다. 바둑을 위해 설립된 ‘잉창치 위기(圍棋=바둑)교육기금’은 프로 세계대회 외에 세계 청소년 바둑대회 같은 것도 주최하고 있으며 유럽의 각종 바둑대회를 후원하고 있다.
잉창치 위기교육기금이 관여하는 바둑대회에서는 잉창치룰과 잉창치가 개발한 대국용 계시기, 바둑알통 등의 용구가 사용된다. 바둑 보급에 공헌한 사람은 많으나 아직은 잉창치 선생이 제일이다. 그를 기리는 사람들은 “선생 이름의 끝 글자가 ‘바둑 기(棋)’였으면 이름 자체가 ‘바둑의 번창’이니 그야말로 명실상부였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잉창치배와 한국 바둑의 인연은 기막히다. 제1회 대회에서 한국 대표로 유일하게 초청받은 조훈현 9단이 당대 중국 바둑의 영웅 녜웨이핑을 결승에서 꺾고 우승했을 때의 감동과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게 한국 바둑 웅비의 발판이었다. 그러더니 조 9단의 뒤를 이어 서봉수 9단, 유창혁 9단, 이창호 9단 등 1990년대 한국 바둑의 4인방이 차례로, 그것도 나이 순으로 제2, 3, 4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제5회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했던 한국기사는 바로 최철한 9단이다. 상대는 중국의 창하오 9단. 당시 기세로 보아 최 9단이 이겨 역사를 이어갈 줄 알았는데, 최 9단은 유리한 바둑을 거푸 놓치며 패퇴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욱일승천의 기세로 내달리던 최 9단이 돌연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던 시점이 바로 그 무렵이었고, 그 원인이 바로 잉창치배 등정 실패였다. 선배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 필승지세의 대국을 놓친 자책감과 분함 등을 추스르기에는 최 9단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번 싱가포르 회전에는 두 주인공 말고 또 한 사람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이 있었다. ‘살아 있는 기성’ 우칭위엔 9단이었다. 올해 95세. 노구에 건강도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건만 참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기꺼이 입회인이 되어 주었다. 그의 등장에 대국장의 모든 사람들은 옷깃을 여몄다.
그나저나 이거 이번에는 누구를 응원해야 하나. 이창호 9단의 건재를 확인하는 쪽에 걸어야 하는 것인지, 최철한 9단의 상처 치유를 기원하는 쪽에 걸어야 하는 것인지.
잉창치배는 우리에겐 정말 고마운 기전이다. 우승 상금 40만 달러. 올해는 환율이 올라가 예전에 4억 원 정도였던 것이 6억 원이 되었다. 환율 때문에 우리는 허리가 휘지만 두 사람에겐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일. 외화 획득으로 위안을 삼자.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