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8일 WBC 대표팀 출정식이 있기 전날 기자와 만난 봉중근은 올림픽에 이어 WBC까지 대표팀 선수로 참가할 수 있게 된 데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진정한 애국심을 알게 됐어요. 결승전에서 (박)진만이 형이 공을 잡고 더블 플레이 시키는 데 눈물이 났다니까. 그래서 그때 KBO 관계자 분들 만나면 WBC 때도 절 꼭 뽑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실력은 별 볼 일 없어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꼭 뽑아달라고 했었죠.”
봉중근은 태극마크는 매번 달고 싶은 유혹과도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태극마크를 달면 이상하게 자신감이 업그레이드 돼요. 그래서 마운드에 서면 이치로도 무섭지 않다니까요. 박찬호 형이나 다른 선배들한테 물어보니까 다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더라고요. 대표팀은 해도 해도 또 하고 싶다고. 물론 소속팀에서의 성적이나 경기력 때문에 몸을 사리는 선수들도 있겠지만 전 달라요. 미국에서 오랫동안 고생을 해서 그런지 대표팀 생활이 너무 좋아요. 그 안에선 LG나 한화, 삼성, 이런 게 없잖아요.”
신일고 3학년 시절 미국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해 마이너리그에서 생활하게 된 봉중근은 10여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며 미국 야구에 대한 꿈을 부풀렸지만 결국 실패하고 LG트윈스로 돌아왔다. 미국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묻자 봉중근은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영어가 안 되니까 어느 순간부턴 벽하고 얘길 하게 되더라고요. 벽에다 대고 ‘난 왜 여기 왔나?’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는 키도 크고 해서 미국 가면 잘 적응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까 제 키가 작은 편에 속하더라고요. 키 큰 선수들 틈에 선 제 모습이 어찌나 초라하던지, 그때 기가 팍 죽었어요. 영어를 못하니까 선수들에게 말도 못 걸고, 배가 고파도 참아야 하고. 단체로 저녁에 어디 식당 가서 밥 먹을 땐 괜히 멋쩍고 되게 서러웠어요. 그때 ‘야구 잘해야겠다’라고 결심했어요. 야구 잘하는 것 말고는 절 어필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봉중근은 LG와의 계약이 끝나면 다시 한 번 외국 생활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지금처럼만 공을 던질 수 있다면 메이저리그 무대에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지금과 같은 컨디션이라면 미국에서도 10승은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 꼭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어요. 그런데 아직 멀었죠? 5년은 지나야 하니까. 5년 후면 서른네 살인데 가능할까요? 그래서 이번 WBC 대회가 중요해요. 일본 애들도 그렇고 미국 선수들에게 봉중근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꼭 보여줘야 하거든요. 잘하고 싶어요. 잘할 자신도 있고. 꼭 지켜봐 주세요. 태극마크만 달면 우린 달라진다니까(웃음).”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