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Y바둑배 시니어 연승전 첫대결을 펼친 박진열 8단(왼쪽)과 박영찬 3단. 해설과 진행은 박상돈 7단, 임동균 아마7단이 맡았다. | ||
총 예산은 1억 4000만 원. 작은 기전이 아니다. 3연승을 하면 대국료 외에 200만 원, 다음부터는 1승을 더할 때마다 100만 원의 연승 보너스를 받고, 우승팀은 5000만 원의 상금을 차지한다. 한 사람당 600만 원 정도가 돌아가는 셈이다.
조훈현 9단의 국수팀에는 ‘무등산 검객’ 오규철 9단, ‘난전의 명인’ 김일환 9단, ‘부산의 늦깎이 신사’ 장명한 5단, ‘스마트한 이론파 오빠’ 김종수 6단, ‘가끔씩 대형사고를 치는’ 나종훈 6단, 남자들도 무서워하는 ‘철녀’ 루이나이웨이 9단, ‘잡초류의 터프 가이’ 박영찬 3단 등이 포진했다.
서봉수 9단의 명인팀에는 ‘영원한 국수’ 김인 9단을 필두로 ‘반상의 손오공’ 서능욱 9단, ‘실험실의 공부벌레’ 양재호 9단, 탤런트 같은 외모의 차수권 6단, 이창호보다 먼저 돌부처 소리를 들었던 안관욱 6단, 바둑도장의 선구자 권갑용 7단, 대기만성의 견본 박진열 8단 등이 가세했다.
김인 9단이 눈에 띈다. 언제부터인가 공식기전에 거의 출전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중진-노장-동료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모처럼 기전 나들이를 결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환 9단은 난전의 ‘명인’이니 국수팀이 아니라 명인팀으로 가는 게 어울렸을지 모르겠다. ‘잡초류’ 박영찬 3단도 잡초류의 대명사 서봉수 9단 팀으로 가는 게 맞았을지 모르겠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국수팀이 약간 우세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의 후광 때문이다. 거기다 조훈현-이창호 사제를 따돌리고 한국 최고 전통의 ‘국수’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던 루이 9단도 있다. 한편에서는 이번이야말로 루이 9단의 참 실력,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루이 9단으로서는 같이 대국해 본 경험이 거의 없어 피차 생소한 우리 중견-노장들이 더 어려운 상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이 대회는 3월 27일 박진열 8단과 박영찬 3단의 첫 대결로 본격적인 막을 열었다. 해설은 1956년생, 1981년 입단인 박상돈 7단, 해설 진행은 아마 바둑계의 맏형으로 통하는 임동균 아마7단이 맡았다. 중년들의 잔치였다.
박진열 8단은 1942년생. 67세의 노장이다. 입단도 늦었다. 1975년 서른세 살 때 원을 풀었다. 입단 자체가 그야말로 7전8기의 입지전적 스토리였다. 입단이 원체 늦었으니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고향인 마산에 자리를 잡고 바둑 보급과 후진 양성에 정열을 쏟았다. 지금 마산은 경남 제일의 바둑 도시다.
박영찬 3단은 기인 계보에 속한다. 1960년생. 1984년에 입단했다. 입단 전에는 이른바 전국구 아마 강자로 이름을 날렸고, 입단하자마자 당시 굴지의 기전이던 기왕전 본선에 진출, 기염을 토했다.
주변에서는 박 3단이 계속해서 성적을 낼 걸로 잔뜩 기대를 했지만, 이후 박 3단이 보여 준 것은 성적이 아니라 기행이었다. 승단대회에는 주로 불참했고 웬만한 기전에는 출전하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을 떠도는 낭인 같았다. 무슨 상식 같은 것, 특히 속박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에는 체질이 맞지 않았던 까닭이다. 입단한 지 25년이나 되었는데도, 동료 선후배들이 모두 9단을 달았는데도 혼자만 아직 3단에 머물러 있는 것도 그래서다.
박진열 대 박영찬, 양박 대결은 재미가 있었다. 엎치락뒤치락 대마를 주고받는 육박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바둑을 구경하는 동안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요즘 노장들은 대우를 잘 못 받고 있는데, 시쳇말로 찬밥 신세인데,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노장들 때문에 기전이 재미가 없어진다는 둥 박진감이 떨어진다는 둥 스폰서가 잘 나서지 않으려 한다는 둥 마치 노장들이 바둑계 발전에 걸림돌이라도 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개혁의 대상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 대회가 끝나면 그런 얘기는 좀 수그러들 것 같다.
그 날 바둑을 구경한 중년 바둑팬들은 하나같이 흥미만점이었다면서 이런 대회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박영훈 강동윤 구리 등의 바둑보다는 내용이 못할 것이나 재미는 못할 게 없다. 노장들에게 비호의적인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포츠 종목에서는 노장들의 대회란 게 아예 의미가 없다. 그러나 바둑은 노장들의 승부도 재미가 있고 친근감은 더 있다. 팬들이 느끼는 친근감, 이건 큰 장점이다. 그리고 사실은 노장들도 젊었을 적에는 다들 기재 있다는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다.
또 하나. 연구생이나 젊은 강자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 바둑계 발전을 위해선 어린 재목들을 많이 길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실질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구매력이 있는 중년들을 놓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것 아닌가.
중년들은 동년배의 기사들이 아들뻘 되는 어린 기사들에게 맥없이 지는 걸 보면서 어린 기사들의 기량에 찬탄을 보내지만 서글픔도 느낀다. 나이는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도 곱씹는다. 그런 중년들에게 동년배의 기사들이 신바람 나게 바둑을 두면서 투혼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좋은 것 아닌가. 구매력 있는 중년들이 흥미를 느끼며 돈을 쓰게 하는 것,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회 이름은 좀 진부하다. 중년의 잔치, 이런 건 너무 웃길까.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