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만 남기고… 김호 감독은 지난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물러나는 것임을 강조했다. | ||
김호 감독이 물러난 표면적인 이유는 성적부진이다. 대전은 5월 20일 부산 아이파크에 3-2로 승리하기 전까지 6경기 연속 무승(2무4패)으로 비틀댔다. 하지만 계약기간이 5개월밖에 남지 않은 노장의 갑작스러운 퇴진 원인이 성적부진만은 아니다. 파국을 몰고 온 데는 성적부진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이사회가 김 감독 자진사퇴를 결의한 건 감독과 구단의 갈등이 함께 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감독과 구단의 갈등은 2008년 초부터 시작됐다. 김 감독이 2007년 7월 대전 지휘봉을 잡았을 때 구단 사장은 언론인 출신이었다. 프로스포츠팀 운영 경험이 없던 당시 사장은 김 감독의 뜻을 대부분 수용하는 쪽으로 구단 운영을 했다.
CEO형 지도자로서 구단 운영에 자신의 뜻을 반영하던 김 감독이 구단과 갈등을 빚은 건 프로스포츠 전문 경영인 출신인 송규수 사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송 사장은 감독과 전문 경영인의 영역을 구분하길 원했고 이 과정에서 양측의 갈등이 불거졌다.
김 감독은 전임 사장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송 사장이 부임한 뒤에도 용병 선발과 관련해 구단이 시민구단으로서의 예산 문제를 들어 난색을 보일 때면 대전시와 직접 접촉했다. 시를 움직여야 구단이 마음을 바꿀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2009년 초 고창현을 부산 아이파크에서 영입하는 초기 과정에서 이적료 협상을 진행했고 지인을 부단장으로 임명해 달라고 부탁하는 등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구단 운영에 적극 관여했다.
김 감독은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구단 생각은 달랐다. 야구단 단장으로 행정 경험이 풍부한 송 사장은 감독의 행동을 월권으로 보고 불쾌하게 생각했다.
구단 이사회 및 송 사장의 생각과는 달리 김 감독은 갈등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나와 송 사장은 의견이 다른 것뿐인데 주위에서 그것을 나쁘게 본다”라고 해명했다. 이어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서도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월권 논란에 대해서는 “경영 간섭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그저 대전이 더 나은 길로 발전하길 바라는 뜻에서 비전을 제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인을 부단장으로 추천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축구를 좀 더 잘 아는 사람이 구단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사회에 진언해 축구를 잘 아는 사람을 부탁했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일이 진행됐다”라고 설명했다.
감독과 구단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 장본인이 특정 에이전트라는 지적이 있다. 김 감독의 대변인이라는 말을 듣던 이 에이전트는 자신의 회사 여직원이 브라질 에이전트와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던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구단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 여직원은 메신저에서 ‘감독이 구단 사장 및 사무국장을 바꾸고 싶어 한다(There-fore, the coach would like to change the president and the general manager this time)’고 주장했는데, 깜짝 놀란 브라질 에이전트는 구단 프런트에게 메신저 내용을 PDF 파일로 보내며 진의를 물었고 구단은 이 일로 에이전트는 물론 감독까지 의심하게 됐다.
이 에이전트는 얼마 전 구단 직원의 공금횡령을 주장하는 내용의 투서가 대전시에 들어가는 데 관련된 걸로 알려졌다. 투서 내용이 시 자체 감찰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고, 이후 법정공방으로 이어지며 한동안 구설에 오르내렸다.
물론 이 에이전트는 자신을 향한 비판에 강하게 항변한다. 김 감독의 해임이 결정되자 “결국 구단과 내 관계가 갑과 을 아닌가. 그쪽에서 날 죽이려고 하면 나는 살아날 방법이 없다”고 억울해했다. 부하 직원의 메신저 사건에 대해서는 “난 그때 외국으로 출장을 가 있는 상태여서 그녀가 왜 그런 내용의 글을 썼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임신 상태의 부하직원이 뭔가 왜곡됐다고 눈물을 흘리고 말하는 만큼 일단 그걸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며 “거짓을 진실처럼 구단에 제시한 브라질 에이전트를 FIFA에 제소할 계획”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김 감독은 해임을 선택한 날 기자회견에 동석한 에이전트를 옆에 두고 “구단에 선수 영입에 관한 영수증을 비롯해 모든 증거가 있다. 에이전트는 구단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특정 에이전트가 어디에 있는가.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에이전트가 좋은 에이전트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전은 이번 사태를 CEO형 지도자와 프로스포츠 전문경영인의 충돌로 보고 앞으로 감독과 사장을 뽑을 때 각별하게 신경 쓰기로 했다. 대전 같은 시민구단에는 강원FC나 인천 유나이티드처럼 카리스마를 갖춘 프로스포츠 전문경영인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에 걸맞은 인사를 사장으로 선임하고 그와 호흡을 맞출 수 있는 감독을 뽑기로 했다.
대전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왕선재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아 잔여 시즌을 치를 예정이라 당분간 코칭스태프에는 큰 변화가 없겠지만, 프로스포츠 전문경영인이 맡을 신임 사장의 경우는 빨리 결정될 것”이라고 전했다.
전광열 스포츠칸 축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