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쪽 눈 감고 승리... 지난 11일 UFC 100에 출전한 추성훈이 앨런 벨처에게 하이킥을 구사하고 있다(맨 위 사진). 왼쪽 눈 부위를 크게 다친 채 경기를 하는 모습(가운데 사진). 상대 안면에 훅을 날리는 모습(맨 아래 사진). 사진출처=UFC | ||
# “아이고 죽겠네” 엄살
추성훈의 경기시작 30분 전 라커룸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앞서 다크매치로 경기를 치른 김동현이 완벽한 판정승을 거둔 후 축하인사 차 그의 라커룸으로 갔는데 마침 추성훈이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김동현은 “역시 추성훈 선수는 대선수답다. 10개월 만의 경기이고, UFC 데뷔전인데 긴장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어제부터 쭉 계속 봐 왔는데 정말 멋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기자가 추성훈에게 “한국기자다. 한국 팬들의 기대가 대단하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추성훈은 “아이고, 죽겠네 죽겠어”라며 웃음으로 답했다. 컨디션이 좋으냐는 질문에는 “아주 좋다”라고 힘있게 답했다. 추성훈은 김동현의 승리에 아주 기뻐했고, 경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촬영에 응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 투지로 극복한 부상
기념비적인 UFC 100대회가 열린 만덜레이베이 이벤트홀에는 수백 명의 취재진이 몰렸다. UFC는 데이나 화이트 UFC 대표가 미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NFL(미식축구)에 도전장을 낼 정도로 이제 미국에서도 인기 스포츠다. 당연히 미국 기자들이 더 많았지만 일본 기자들도 많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국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다르지만 일본에서도 추성훈의 지명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수십 명의 일본 취재진이 몰려왔다
경기 전 현장의 일본 기자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추성훈은 경기감각과 훈련량이 문제였다. 즉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체력’이 우려됐던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일본 기자는 “아시다시피 일본에서 추성훈의 이미지는 한국처럼 좋지 않다. 하지만 어쨌든 지명도가 높은 선수이고, 아직 UFC에서 성공한 일본 선수가 없다는 점에서 이번 경기가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강한 상대가 아니지만 추성훈이 오랫동안 링에 오르지 않았고, 또 낯선 UFC 경기장 분위기와 훈련량이 다소 적다는 평가 때문에 걱정이 된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추성훈이 이제는 고참 선수가 된 까닭에 일본에서는 그를 강한 훈련으로 이끌 분위기가 잘 연출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향후 UFC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연공서열을 따지지 않는 미국 현지 훈련을 주로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로 이날 경기에서 추성훈은 2라운드 중반 이후 급격한 체력저하를 보인 끝에 2-1 힘겨운 판정승을 거뒀다. 판정 직후 미국 선수의 패배를 아쉬워하는 미국 관중들의 야유가 제법 크게 터져 나왔고, 상대 앨런 벨처와 화이트 대표도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발언을 했다. 왼쪽 눈 부위를 크게 다친 추성훈은 경기 직후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을 정도로 큰 데미지를 입었다.
하지만 대체로 판정은 정확했고, 또 경기 내용도 좋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유효타가 더 많고, 줄곧 전진 스텝을 밟으며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친 추성훈이 1, 2라운드는 확실하게 우세한 반면 3라운드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다소 의외이기는 하지만 이 경기가 ‘오늘의 경기’로 선정될 정도로 경기는 익사이팅했다. 이는 추성훈이 부상과 체력저하 등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난타전을 펼친 덕이었다.
#16만 달러의 비밀
추성훈은 이날 대전료 4만 달러, 승리수당 2만 달러, 그리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으로 오늘의 경기로 선정되면서 1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았다. 객관적으로 이날의 압권은 오싹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실신 KO승을 거둔 댄 헨더슨의 경기였다. 추성훈의 경기가 익사이팅하기는 했지만 워낙 KO승부가 많았던 다른 경기에 앞선다는 것은 큰 이변이었다.
비밀은 추성훈의 몸값에서 찾을 수 있다. 추성훈은 일본에서 한 경기당 5000만~1억 원 상당의 대전료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인지도가 낮고, 또 파이트머니가 철저하게 공개되는 까닭에 UFC 무대에서 몸값을 기존 수준에 맞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추성훈은 UFC 진출 때부터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모자라는 금액을 새롭게 매니지먼트사로 계약한 한국의 IB스포츠를 통해 보전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IB스포츠는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액수의 계약금을 지불했고, 또 UFC의 한국 중계권자로 UFC에 영향력이 있는 까닭에 ‘오늘의 경기 선정’을 통한 대전료 맞추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번 UFC100에는 IB스포츠 직원 두 명이 파견됐다. 여러 업무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추성훈 관리’였다. IB스포츠 직원은 “추성훈이 관련된 돈 얘기는 절대 공개할 수 없다. 어렵게 특급 선수를 UFC에 데뷔시킨 만큼 좋은 성적을 내고, 또 한국에서 큰 반향이 있기를 기대할 뿐”이라고 답했다.
# ‘스턴건’이 본 추성훈
▲ 이날 압도적으로 판정승을 거둔 김동현은 추성훈 경기를 녹화까지 하며 관심 있게 지켜봤다. | ||
재미있는 것은 김동현의 반응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처음 “추성훈과 붙으면 자신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제가 아직은 안 되죠”라며 추성훈을 치켜세웠다. 또 경기 전에는 추성훈이 일방적으로, 그러니까 화끈한 KO승을 거둘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추성훈의 1라운드가 끝나자 “솔직히 추성훈 선수가 판정으로 이겼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이색 반응이 나왔다. 자신이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판정으로 이겼는데 추성훈이 KO로 이기면 한국에서 자신의 승리가 묻힐 것 같다는 ‘솔직한’ 걱정을 내비친 것이다. 하지만 2라운드 중반 이후 추성훈이 다소 밀리자 이번에는 주먹을 불끈 쥐어가며 추성훈을 응원했다. 피는 진한 법이다. 그리고 2-1 판정승이 발표되자 크게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동현은 “추성훈 선수가 지고 저만 이기면 당장은 제가 신문에 몇 줄 더 나갈 수 있겠죠. 하지만 한국에서 UFC 전체의 인기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추성훈 선수의 승리가 꼭 필요합니다. 그게 저한테 더 큰 득이죠”라고 설명했다. 대신 “세계적인 선수도 UFC 데뷔전에 고전할 정도로 UFC는 선수들에게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에요. 제가 비록 판정승에 그쳤지만 그만큼 큰 무대이고, 이기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꼭 신문에 써주세요”라고 특유의 선한 웃음과 함께 ‘민원’을 넣기도 했다.
웰터급인 김동현은 키가 184cm로 미들급의 추성훈(178cm)보다 오히려 6cm가 더 크다. 향후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릴 가능성이 큰 것이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추성훈보다 지명도가 더 높다는 김동현이 UFC에서 추성훈과 맞붙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LA=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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