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길 6단 | ||
1997년에 입단했다. 입단 직후 공식 기전에서 18연승을 기록하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2001년에는 굴지의 기전 왕위전에서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 타이틀을 눈앞에 두었었다. 한마디로 장래가 촉망되던 기재였고, 실력 서열 10위권 안이었다. 그 무렵 변수가 찾아왔다. 군 입대, 그리고 바둑판 바깥 세상에 대한 맹렬한 호기심이었다. 2004년에 입대해 2006년에 제대했다. 나와 보니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바둑 동네에는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나이 어린 후배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벅찬 상대였다.
작전을 세웠다. 1년을 바둑공부와 승부에 바치자. 그래서 되면 승부의 길로 가는 것이고, 안 되면 다른 길로 가자. 1년이 지났다. 승부는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해외로 눈을 돌렸다. 바깥으로 나가 바둑 보급도 하고,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하자. 영어가 필요했다. 한상대 교수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바둑영어교실을 찾았다. 파고들었다. 1년여가 지나자 영어에 불편이 없어졌다. 바둑을 영어로 강의하고 가르칠 수 있는 건 물론이다. 안 6단 비슷한 수준으로는 여류 기사 이하진 3단(21)이 있다. 두 사람은 한상대 교실 동문이다.
2006년 여름, 유럽을 돌면서 영국 바둑계를 두드려 보았다. 비자가 걸렸다. 이후 유럽을 한 번 더 돌았는데 만만치 않았다. 지난해에는 미국을 여행하면서 뉴욕 등지에 응수타진을 해 보았다. 역시 여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유럽과 미국에는 이미 한·중·일에서 바둑을 보급하러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호주는 자리를 잡기가 조금은 수월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한상대 교수의 권고에 따라 작년 8월 호주로 건너가 열 달쯤 머물면서 가능성을 확인했다. 마음을 굳힌 상태에서 지난 7월 초순 귀국해 2주일 정도 준비를 하고 7월 21일 호주로 돌아갔다.
돌아가자마자 기원을 인수했다. 안 6단보다 먼저 건너가 애를 쓰다가 얼마 전에 귀국한, 허기철-이세나 부부가 운영하던 기원이었다. 이세나 6단은 이세돌 9단의 누나.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스트우드 전철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이는 아담한 건물의 2층. 실내는 30평 정도인데, 방이 3개. 거기가 안 6단의 집이자 강의실이다.
한 달에 최소 200만 원이 필요하다. 집세가 160만 원, 전기 수도 통신비 등이 20만 원. 먹는 비용은 많이 들지 않는다. 한국기원에서 해외보급 프로기사에게 보조하는 돈이 한 달에 60만 원. 140만 원을 벌어야 한다. 그 정도는 벌 수 있고, 사정은 점점 나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어린이 교실을 열었고, 지도 받기를 원하는 호주 사람이나 우리 교포도 꽤 있기 때문이다. 영주권이 나오면 호주의 ‘국가 바둑코치’도 될 수 있다. 국가코치가 되면 정부의 지원금을 받는다. 1년에 몇 천 달러 정도라 큰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움이 된다.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활동한 적이 있어, 우리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중국인 우쑹성 9단이 국가코치였는데, 얼마 전 작고했다.
호주바둑협회에서도 안 6단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바둑 최강국 한국의 프로기사이고, 실력도 지금까지 호주에서의 활동을 모색했던 한-중-일 프로기사 중에서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호주바둑협회나 바둑클럽에도 열혈 바둑팬이 적지 않고, 특히 ‘시드니 바둑클럽’은 역사도 50년이나 된다. 안 6단이 사귄 사람 가운데 돈 포터(Don Potter)라는 바둑광이 있다. 일본의 대학에서 오랫동안 동양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한 학자로 독신의 거부(巨富)다. 부모의 유산이 엄청났다. 바둑 실력은 아마 4단 수준이며 피아노 연주가 프로급 솜씨인 멋쟁이다. 또 조기에 은퇴한 후 호주 남동쪽의 큰 섬, 태즈메이니아에 대규모 목장을 일궈 수천 마리의 양과 소를 기른 적이 있는데, 목동을 채용할 때, ‘일과 후에 바둑을 배우겠다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는 기인이다. 그는 약속대로 밤마다 목동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그 목동 중에서 아마 유단자도 몇 명 나왔다고 한다.
제프리 그레이(Jeffrey Gray). 시드디대 수학과 교수 출신으로 초대 시드니 바둑클럽 회장을 맡아 1960년대 호주 바둑계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한국과 중국을 좋아해 1970년대 초에는 중국 만리장성에서 바둑을 두기도 했고 1996년에는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한국의 권갑용 바둑도장을 찾아 몇 달간 바둑 수업을 하고 돌아간 일도 있었다. 아마 2단의 실력. 한국이 그리워지면 친구 한 사람을 ‘꾀어’ 한국으로 날아와 서울 낙원동 여관에 머물며 매일 탑골공원으로 출근, 한국의 노인들과 해질 녘까지 바둑을 두고, 끼니때면 노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무료 국수를 먹었다.
그런가 하면 국립의료원장을 지낼 정도로 잘나가던 의사가 바둑에 빠져 결국은 이혼을 하고 바둑판 제작 사업을 벌여 한국의 바둑판 공장에 견학을 오기도 했던, 데이비드 에반스 같은 사람도 있다. 호주에서는 생산비가 높아 포기하고 말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안 6단을 좋아한다. 후원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안 6단의 도전이 어떻게 성공하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자.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