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박태양 이승준 원하준 문태영 전태풍. | ||
문태영은 득점 부문 2위(11월 19일 현재)를 달리며 팀의 대들보로 우뚝 섰다. 지난 2월 드래프트 당시만 해도 전태풍과 이승준의 그늘에 가려 있던 문태영이 다크호스로 거듭난 비결은 팀플레이 중심의 한국농구에 빠르게 적응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다. 문태영 스스로도 “시즌 전 동료들과 같은 산을 열 번이나 쉼 없이 오르내렸는데 미국에서 경험할 수 없는 혹독한 훈련을 받는 동안 개인이 아닌 단체라는 것에 눈을 떴다. 이것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이유다”라고 밝혔다. 더불어 “문태영의 세이커스가 아닌 세이커스의 문태영이 되라”는 강을준 감독의 거듭된 충고 역시 팀플레이에 빠르게 적응해 나갈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다. 실제 문태영은 인터뷰 당일, 훈련이 없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 나와 동료들의 연습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반대로 팀플레이를 등한시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수도 있다. 드래프트 당시 1순위로 주목 받았던 전주KCC의 전태풍은 과도한 개인플레이와 잦은 실책으로 허재 감독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때문에 경기가 끝나면 바로 허 감독과 모니터링하며 개인과외를 받는다고. 자주 지적을 듣는 과도한 개인플레이에 대해 전태풍은 “처음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되며 관심이 집중됐을 때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했다”며 오히려 문태영에게 스포트라이트가 가 있는 지금이 경기에 집중하는 데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토로한다. 전태풍은 자신의 최대 라이벌로 빠른 발로 승부를 거는 동양 오리온스의 김승현을 꼽는다.
드래프트 2위로 지명됐던 이승준 역시 전태풍과 비슷한 부담감을 경험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면 고작 30점 정도라며 디펜스와 리바운드 부분에서 아직 많이 미숙하다고 지적했다.
앞서 세 명의 선수는 나머지 두 선수에 비하면 그래도 꽤 안정적으로 한국농구에 안착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원하준과 박태양의 경우 매 경기 출장시간이 10분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부산 KT의 경기가 끝나는 날이면 박태양은 문태영과 전태풍에게 번갈아 가며 전화를 건다. “형, 나 어떡해. 또 많이 못 뛰었어. 어떡해”라는 동생의 속앓이에 문태영과 전태풍은 ‘Keep trying’와 ‘Stay strong’이라고 조언해준다. 아직 어리니까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기회를 기다리고 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격려의 메시지도 잊지 않는 ‘형님’들이다.
귀화 혼혈 선수 5인방 중, 코트 밖에서 가장 바삐 움직이는 선수는 박태양. 올해 23세인 그는 부산KT의 막내다. 가장 나이가 어리다보니 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서 처리한다. 막내 생활에 대해 그는 “엄청 바쁘다”는 말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린다. 선배들의 물 심부름에서부터 수건, 유니폼 개기, 속옷 빨래까지 모두 박태양의 몫이다. 미국에서 활동했던 박태양은 “처음에는 다른 선수들의 빨래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 놀라웠는데 이제는 선배들이 필요한 것을 곧잘 챙긴다”며 환하게 웃는다.
원하준 역시 쉬는 시간 없이 훈련에 임하고 있다. 훈련시간 외에도 2군 선수들과 틈나는 대로 연습하며 제 기량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는 “기량과 실력에서 전혀 뒤지지 않지만 3년 정도 농구를 쉬었다가 돌아온 탓에 아직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서 “지금은 출장 시간이 적은 데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즌 초반 능숙한 한국어로 관심을 모았던 것은 박태양이지만 최근에는 전태풍의 한국어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 비결은 허재 감독의 혹독한 트레이닝 때문. 허 감독은 “너는 한국인인데 왜 통역이 필요하냐”며 스스로 언어의 장벽을 극복할 것을 주문하고 전태풍의 통역담당을 빼버렸다. 경기 중 아무리 중요한 순간에도 따로 통역을 해주지 않는다. 때문에 시즌 초 그와 동행하던 통역은 현재 용병들만 전담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동료로부터 “야 왜 영어해, 너 미국인이야?”하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래도 이제는 ‘제껴’, ‘정신 차려’ 같은 말은 곧잘 알아듣는다며 하루하루 늘어가는 한국어 실력에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문태영은 “강을준 감독님을 처음 뵈었을 때 무표정한 얼굴이라 상당히 겁을 먹었다”고 고백한다. 이후 훈련이나 경기에서도 자신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도통 감독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 종종 통역담당에게 감독의 의중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가 거듭될수록 문태영이 팀플레이에 녹아나며 공헌도가 높아지자 시즌 초반 ‘칭찬하지 않는 리더십’으로 유명한 강 감독도 요즘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정확히 6연승을 달성했을 때부터 ‘잘했어, good job’이라고 등을 쳐주더니 지금까지 매 경기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에 칭찬을 거듭해 구단 관계자들도 강 감독의 변화에 놀랍다는 반응이다.
원하준, 이승준, 박태양이 느끼는 한국인 감독들의 스타일은 엄격하고 강인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다섯 명의 선수들이 만날 때면 늘 대화의 화두는 감독들의 심리 파악. 이승준은 “혼혈 선수들이 모이면 주로 감독님에게 혼이 났던 순간들을 하소연하며 각자가 뭘 잘못한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고 말한다. 일찍 한국농구에 눈 떠 예쁨(?)을 받고 있는 문태영은 단연 주목받는 카운슬러다.
이들 5명이 귀화한 이유에는 모두 ‘어머니’가 존재한다. 원하준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무대를 밟았다. 한국에서 농구선수로 큰 활약을 하면 어머니가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3년 동안 잡지 않았던 농구공을 들고 귀화혼혈 선수 드래프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가 10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해야만 했다. 아직 그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는 원하준은 “한번 뵙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시즌 초반 받았던 심적 고통을 앞으로 농구 성적 향상으로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태영은 한국에서 모든 가족이 모여 살기를 원하는 어머니의 바람 때문에 귀화를 결정했다. 코트 위에서는 상대 선수를 쩔쩔매게 하며 물 샐 틈 없는 활약을 펼치는 괴물이지만 경기가 끝나면 팀 동료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공처가로 변신한다. 휴식 시간이나 훈련 중간 중간에 짬이 날 때마다 휴대폰을 들고 영상통화에 푹 빠져 산다. 5개월 된 딸과 아내의 얼굴을 보는 일은 농구와 함께 자기 인생의 제1 우선순위라고.
이승준은 먼저 한국무대에서 뛰고 있는 동생 이동준의 권유로 오게 됐다. 장황한 설득 같은 건 없었다. 이승준의 마음을 움직인 건 “외로워, 형이랑 같이 살고 싶어”라는 동생의 한마디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동생은 한국으로, 이승준은 세계 각지로 떠돌아다니며 농구선수로 활동하다 어머니의 나라에서 형제가 상봉하게 된 것이다.
다섯 선수 모두 최종 목표는 국가대표다. 문태영은 그 이유로 “혼혈인으로서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경기에서 활약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열악한 환경에 있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용기를 얻기 바라는 마음으로 창원 지역 혼혈아동들에게 이번 프로농구 시즌권을 기부하기도 했다.
성조기 사이 태극기가 쑤욱
'문신'을 입은 그들
▲ 전태풍 | ||
전태풍의 문신은 진짜 한국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등 근육에 힘을 바짝 주면 성조기가 있지만 긴장을 푸는 순간 가운데가 찢어지는 그림과 함께 그 안에서 태극기가 등장한다. 전태풍은 “이전에도 가슴에서부터 한국인이었고 이젠 진짜 한국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원하준의 왼쪽 팔에는 십자가 가운데 농구공이 새겨져 있는 문신이 있다. 12년 전, 농구선수로 성공하고자 했던 그 꿈을 잊지 않기 위해 문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코트 밖 1문1답
외꺼플 미녀 씨엘에 반했어요
원카운트...1초 쉬라고? 멍~
▲ 씨엘 | ||
▲쌍꺼풀 없는 동양적인 외모를 지닌 2ne1의 씨엘(사진)이 3표를 얻어 다른 걸그룹 멤버들을 모두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원하준의 경우 구단 관계자에 따르면 경기장 모니터 화면에 2ne1의 히트곡 ‘아이 돈 케어’가 나오면 씨엘의 동작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춘다고 한다.
―현재 여자친구가 있나.
▲미모의 여자친구와 열애 중인 전태풍과 ‘품절남’ 문태영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명은 현재 여자친구에게 차인 ‘시련남’이다. 미국과 한국의 장거리 연애를 견디지 못한 여자친구들이 이별을 선언하고 떠난 것. 이승준은 “영어 잘하는 한국 여자를 열심히 탐색 중이다”라고 말했다.
―경기 후 자신의 기사와 악플 점검도 하는지.
▲전태풍은 “인터뷰 기사가 나갈 경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끝까지 번역해 읽어 보고 댓글도 챙겨 본다. 그러나 경기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절대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승준의 경우 매 경기 친척들이 문자 메시지로 기사 내용을 요약해 보내준다고. 경기 결과가 나쁠 때는 즉시 친척들에게 전화해 절대 기사를 검색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등 언론의 반응에 예민한 편이다.
―농구 속어 중 가장 알아듣기 힘들었던 말은?
▲다섯 명 모두 ‘원 카운트, 투 카운트’를 꼽았다. 정확한 용어는 원 패스 어웨이, 투 패스 어웨이로 한 번의 패스에 주변 수비자의 상황이 어떤지 일컫는 용어다. 이 용어를 한국에서만 원 카운트, 투 카운트라는 농구 속어로 사용하는데 혼혈 선수들은 처음에 1초 쉬고 2초 쉬다가 뛰라는 뜻인 줄 알고 영문을 모르고 멍하게 서 있다가 감독들에게 몇 번 혼쭐이 나고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손지원 인턴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