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치문 정인규 신병식 한건호 선수의 천하사목팀(오른쪽)이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 ||
‘김인배’는 국내외적으로 유일한 ‘시니어’ 대회다. 남자 단체전, 여자 단체전, 개인전이 있고, 남자는 50세 이상, 여자는 30세 이상이어야 출전할 수 있다. 여자 30세를 중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중년을 위한 바둑대회인 것. 지난번까지는 남자 60세, 여자 40세 이상이었는데, 올해는 10년을 낮추었다. 그 덕분에 참가자가 대폭 늘어났다.
‘김인배’는 또 국제대회다. 이번 대회 남자 단체전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태국 싱가포르 호주 등 일곱 나라에서 온 아마추어 고수들이 4명씩 한 팀을 이뤄 총 32개 팀 시니어들이 기량을 겨루었다. 여자 단체전과 개인전을 합해 총 참가자는 300여 명.
‘김인배’는 출범 때부터 ‘이색적이다’ ‘발상이 신선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세 번을 치르면서 ‘특화에 성공했다’ ‘차별화의 견본을 보였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의미가 있는 대회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미덕이 되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무섭게 된 지 이미 오래된 사회 풍조에서 나이 먹은 사람들만을 위해 따로 마당을 마련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10여 년 전에 일본에서는 ‘실년(實年)’이란 말이 잠깐 유행했었다. 중년은 단순히 초년-청년과 노년 사이가 아니라 인생에서 열매를 거두는 나이라는 것이었다. 괜찮은 말인 듯했는데, 대중 호소력은 별로 없었는지 오래 가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크게는 한국 전반, 작게는 한국 바둑계의 중년은 특히 더 애매하고 우울한 건데, 프로-아마 가릴 것 없이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휩쓸고 있는 때에 ‘느닷없이’ 참가 자격을 50세 이상으로 만든 것이 그래서 오히려 ‘모순 속의 신선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
50세 이상이고 게다가 단체전이니 참가자 기량의 수준이 큰 구경거리는 아닐 것이고 박진감도 별로일 것 같았으나 그게 순간적인 착각이었다. 우리 아마 바둑의 대표적 강자들이 사실은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에 몰려 있는 것. 임동균 정인규 양현모 김철중(아마) 박치문 한건호 차진권 하만호 윤철순 최철수 신병식 이웅기 김원태 유종수 김진환 박강수 박성균 등 출전 선수 면면이 대학생 대표나 국가대표였고, 지금도 각 지역에서 아마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이른바 전국구 아마7단급 강자들이다.
이들이 개인전으로 겨루는 여느 대회에서처럼 연구생 출신, 나이 어린 후배들과 싸우다 지는 모습을 재연했을 것이니 신선도가 떨어졌을 것이다. 이들이 출신학교나 지역대표로만 나왔어도 그랬을 것이다. 경기도팀, 강원도팀처럼 지역에서 뭉친 팀도 있었지만 지연, 학연을 떠나 서로 연락해 팀을 꾸리고 ‘천하사목’ ‘석맥회’ ‘이팔청춘’ 등과 같은 팀 이름을 만들어 나왔기에 새로운 흥취와 별미가 있었다.
왕년에 고려대 대표선수로 활약했던 이웅기 선수는 강원도가 연고지다. 현재도 그쪽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대학 시절의 옛 친구들, 대학바둑의 외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절의 김원태, 유종수 팀으로 출전해 강원도팀으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었다.^^
스위스리그 5라운드를 벌인 결과 우승 상금 300만 원을 차지한 팀은 박치문 정인규 신병식 한건호 선수의 천하사목(天下四目)팀. 동률인 경우는 팀의 선수 나이를 합해 많은 팀이 이기는 규정이어서 나이 총합이 280이 넘은 일본 팀 선수들은 “우리는 그 룰에 기대하고 있다”면서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다.
천하사목이란 세상의 어떤 강자에게도 넉 점이라면 지지 않는 실력이라는 뜻. 이창호나 이세돌 같은 프로 정상에게도 넉 점이라면 해볼 만하다는 것. 자신감과 겸손이 버무려져 있다. 위의 선수들 같으면 내심으로는 두 점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목(目)’이 일본식 용어인 것이 좀 그렇긴 하고, 천하사목은 천하넉점이지만, 우리 식 바둑 용어가 정착되기 전,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써오던 말이니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고려청자와 다산 정약용의 강진은 언제부터인가 ‘남도 답사 1번지’로 불린다. 전라남도의 여행이나 답사는 강진부터 시작된다는 뜻일진대 실제가 그럴 것도 같다. 광주 목포 영암 완도 해남, 이 일대의 중심에 강진이 있다. 답사와 여행은 다르면서 같다. 영암과의 경계에 월출산이 있고 바닷물이 U자형으로 내륙 깊숙이 파고들어와 있는 풍광이 수려하다. 한반도의 남단, 아름답고 조용한 시골 바닷가에서 머리가 희끗한 세계의 남녀 바둑인들이 만나 수담을 나누는 모습, 자연과 사람이 잘 어울린 그림이었다.
연세대 정외과, 미국 미주리 대학 정치학 박사인 황주홍 강진군수(57)는 바둑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매년 대회장을 지키면서 흐뭇해한다.
“잘 아시겠지만 김인 선배님이 남 앞에 나서는 건 아주 싫어하시는 분이잖아요. 대회를 기획했던 시간보다 김 선배님을 설득하는 시간이 더 많이 걸렸던 것 같아요…^^ 매년 대회가 더 좋아지고 있어 뿌듯합니다. 내년에는 더 많은 나라에서 참가할 수 있도록, 여성분들도 더 많이 참가하실 수 있게 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강진군은 몇 년 전에 새로 닦는 큰 길을 ‘김인로’로 명명하는 걸 검토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직 길 이름에 없는 걸 보니 역시 김인 9단이 반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김인 9단을 김 선배로 부르는 것, 그것도 신선하다. 우리 바둑계에서는 한국 ‘영원한 국수’로 추앙받는 프로바둑 9단이지만, 고향에 오면 선배니까.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