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코오롱사태’는 당시 국내 스포츠계 10대 뉴스로 선정될 만큼 큰 화제를 모았다. 고(故) 정봉수 감독(2001년 타계)이 김완기 황영조 이봉주 등을 발굴하며 마라톤 명가로 우뚝 세운 코오롱이 뿌리째 흔들린 사건이었다. 2000년 2월 무소속으로 ‘나홀로 훈련’을 하던 이봉주가 도쿄마라톤에서 눈물의 한국신기록을 세우고, 이에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이봉주에게 새 소속팀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자 삼성전자육상단이 창단되면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당시 여론과 육상계 그리고 정부의 압력에 못 견딘 코오롱은 조건 없이 ‘이적동의서’를 써줄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1999년 당시 지영준은 충남체고 3학년으로 이미 코오롱 스카우트가 확정된 상태였다. 아직 입단 전이었기에 삼성행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지영준은 고향(충남 부여)이 같은 오인환 코치(현 삼성전자 감독)가 온갖 공을 들여 스카우트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당시 오인환 코치는 “개인적으로 많이 아깝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어렵게 스카우트했고, 또 선수 자체가 황영조 이봉주 김이용의 뒤를 이을 만큼 훌륭한 자질을 갖췄기 때문이다. 직접 가르치고 싶지만 인연이 아닌 것 같다”며 아쉬움을 삼킨 바 있다. 당시 코오롱은 마라톤팀 해체를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정봉수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 지영준이라는 존재 때문에 팀을 존속시켰다.
이렇게 꼭 10년이 지났다. 2005년 2억 5000만 원에 코오롱과 5년간 재계약한 지영준은 지난 10월 병역을 마치자마자 소속팀 복귀 거부 및 이적을 요구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코오롱에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였다. 지영준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자꾸 얘기하면 코오롱에 계신 분들에게 누만 더 끼치게 된다. 코오롱에서는 슬럼프만 겪었고, 정말로 제대로 운동하기 위해 경찰청 시절 실질적으로 지도를 받았던 원주 상지여고의 정만화 감독과 함께하고 싶을 뿐이다. 팀을 나오는 과정도 정당하게 이적을 요구하고, 선수로서는 부담이 되는 위약금도 지불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쟁점은 위약금 액수다. 코오롱은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계약을 위반했을 경우 계약금의 두 배인 5억 원을 물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지영준은 계약기간 5년 중 4년이 흘렀지만 2년은 군복무를 한 까닭에 2년을 빼면 3년이 남기에 이에 해당하는 1억 2500만 원의 위약금을 내겠다고 한다. 이전에 코오롱에서 계약기간을 지키지 못하고 팀을 떠난 선수들도 계약서 조항대로가 아닌 이 같은 방식으로 위약금을 계산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영준은 “은퇴를 하는 한이 있어도 코오롱에 복귀해서 운동할 수는 없다”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근 대한육상경기연맹이 대구세계선수권 유치에 공이 큰 박정기 전 회장을 중심으로 중재에 나서 ‘남은 3년 계약기간 동안 소속은 코오롱으로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지도는 정만화 감독에게 받도록 하자’는 방안을 내놨지만 코오롱과 지영준 모두 “현실성이 없다”며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위약금 문제에서 어느 정도 타협이 이뤄지면 지영준은 자유의 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인 잔치(세계선수권)를 앞두고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 한국 육상계와 정부가 마라톤 현역 최고기록(2시간8분30초·2009년 4월 대구)을 갖고 있는 지영준을 임의탈퇴선수로 계속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조금 더 앞을 내다보면 ‘탈(脫) 코오롱’에 성공한 지영준의 행보가 관심거리다. 선수 개인이 억대의 위약금을 냈고, 또 이후 집중적인 마라톤 훈련을 위해서는 경비가 적잖이 소요되는데 이를 개인이 다 부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만화 감독은 “솔직히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지영준과 같은 기대주라면 스폰서가 나타날 수도 있고, 대표팀 선수로 대한육상경기연맹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기록을 세울 경우 1억 원의 포상금이 있고, 각종 대회에서 우승 및 기록상금을 받을 수도 있다. 뭐 실업팀 소속으로 내가 위탁훈련을 시킬 수도 있고…, 어쨌든 무조건 가장 좋은 조건에서 마음 편하게 운동할 수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지영준은 삼성 및 오인환 감독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리고 최근 확인된 바에 따르면 지영준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정만화 감독은 오인환 감독과 배문고등학교 동기다. 한때 삼성이 상지여고 유망주를 대거 스카우트했을 정도로 관계가 좋다.
여기에 삼성은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육상단 운영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의 회장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 최근 이봉주의 은퇴로 간판스타가 필요하다. 가만히 있어도 ‘지영준의 삼성행’이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1999년 코오롱 사태의 파문이 워낙 컸던 까닭에 삼성은 극히 조심스럽다. 삼성전자육상단의 조덕호 사무국장은 “현재 지영준 및 정만화 감독과는 접촉 자체가 없을 뿐 아니라 접촉할 생각도 없다. 특별한 과거사가 있는 까닭에 세상이 다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팀의 유망주를 부추겨 빼내올 수는 없는 것이다. 회사 고위층으로부터도 지영준 선수에 관한 문제는 입도 뻥끗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단 조 사무국장은 “지영준이 자유의 몸이 되고, 또 훈련 여건이 좋은 실업팀을 찾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 가서 영입을 추진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인환 감독도 “안타까운 상황이다. 10년 전 내가 직접 스카우트를 했기에 지영준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너무 잘 안다. 하지만 오히려 요즘에는 누구한테 얘기를 건네 듣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저 선수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잘 해결되기만을 바란다”고 말을 아꼈다.
정만화 감독도 “오인환 감독과는 배문고에서 동기로 같이 운동을 했다. 당시에는 운동을 잘하는 선수를 일부러 늦게 졸업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졸업은 내가 1년 늦었다. 당연히 친구 사이고, 예전에 스카우트 문제로 많이 접촉했다. 하지만 최근 지영준 문제가 발발한 후로는 일체 접촉한 바 없다. 그리고 현재 지영준은 나와 함께 훈련하기를 원하고 있기에 삼성행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육상계에서 삼성 파워가 강하고, 또 지영준과 삼성 측의 인연이 깊기에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쉽지 않다. 확실한 것은 ‘포스트 이봉주’가 삶의 궤적까지 이봉주를 닮아가느냐가 현재 한국 육상계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단독보도] 이봉주 결국 삼성과 결별
당분간 자유의 몸 되고 싶다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 ||
<일요신문>이 다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봉주는 최근 삼성의 코치 제안을 끝내 고사했다. 삼성전자육상단 측은 “이봉주 선수에게 정말 여러 차례 팀의 코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오인환 감독과 육상단 스태프는 물론이고, 그룹 고위층까지 나서 설득했다. 이봉주 선수가 몇 차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일단 당분간 편하게 쉬고 싶다며 최종적으로 고사했다”고 밝혔다.
오인환 감독도 10일 전화통화에서 “오늘도 저녁을 먹으며 마지막으로 설득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안다. 실과 바늘로 불릴 정도로 봉주와 함께 다녔는데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너무 짙다”라고 말했다.
오는 12월 31일로 삼성과의 계약이 만료되는 이봉주도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지금까지 계속 실업팀 생활을 해오면서 휴식 시간이 없었다. 가족과도 함께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싶다. 당장은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고 심정을 밝혔다.
한편 이봉주에게 최근 매니저가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으로 알려진 이 매니저는 향후 이봉주의 스케줄 관리, 각종 행사 참여, 광고 출연 등을 담당할 예정이라고 한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