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태일 박사 | ||
단순히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면 별 문제는 없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므로. 시스템 자체의 논리와 계산법에는 이상이 없어 보인다. ‘가중치’나 ‘승률기대치’ 같은 ‘수학적’ 용어들도 얼른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이론의 토대와 골격을 위한 개념들이니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다만 그런 개념들로 이루어진 이론에서 도출되는 랭킹이, 일반 바둑팬이 느끼고 받아들이는 랭킹의 ‘감성적’ 현실감과는 좀 차이가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바둑팬이 주장하는 요점은, 타이틀 홀더에게는 보너스 점수를 주어야 한다는 것. 승부세계는 실제적으로 승자 독식이므로 등위간 점수의 차이가 균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하긴 그렇다. 가령 승률과 타이틀, 어느 것이 팬들에게 어필하느냐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타이틀이다.
그러나 배태일 박사의 통계적 점수제가 상당한 격조의 랭킹 시스템인 것은 분명하다. 합리적이며 정교하다. 수학과 통계학의 아름다움이 잘 녹아 있다. 적용 당사자인 프로기사들도 별 무리나 불만 요소가 없는 것으로 수긍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배태일 시스템으로 하나 상금-타이틀 우선으로 하나 프로기사의 랭킹은 그게 그거다. 실력 있는 사람이 성적도 내고, 타이틀도 따는 것이니까.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것으로 생각된다. 상금과 타이틀로 흥행의 효과를 높이는 한편 가령 국제대회 출전권을 정해야 할 때처럼 프로기사의 랭킹을 정밀히 따져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배태일 시스템을 적용하는 그런 식이면 어떨까.
배태일 시스템은 또 국제용, 특히 서구 쪽 홍보용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바둑의 세계화가 더 진전되어 조만간 세계통합랭킹 같은 것이 필요해질 때가 올 수도 있다. 서구의 바둑인들은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자기들 나름의 랭킹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배태일 시스템은 바둑 선진-최강국의 체모 유지에도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패스(pass)’ 같은 구차한 개념을 끌어들였고 우리는 ‘권리’ 같은 추상적 개념을 도입했는데, 패스나 권리는 ‘바둑판 바깥’의 일 또는 개념이다. 바둑판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바둑판 위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그럴 수 있으면 최선이다. 바둑이 자랑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심판이 필요 없는 게임’이라는 것 아닌가. 귀곡사 같은 게 중국 룰에서는 바둑판 위에서 저절로 해결이 된다.
그러나 귀곡사에 대해서는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겠거니와, 중국 룰은 우리처럼 바둑을 다 둔 다음 서로의 집만 세는 것이 아니라 바둑판 위에 놓여 있는 돌들도 모두 세야 한다. 바둑의 매력을 격감시키는 그 우매한 짓이 귀곡사를 해결하는 장점을 퇴색시키고도 남는다.
강병원이라는 바둑팬이 있었다.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 대입전문 종로학원에서 강의를 했던 분으로 몇 년 전에 60대 초반 아까운 나이에 타계한 분이다. 이 분이 만든 바둑 룰이 있었다. 강병원 룰은 중국 룰처럼 종국 후 그렇게 번잡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바둑판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 우리는 그냥 바둑을 두면 되는 것.
바둑에서의 ‘집’이란 것을 수학적으로 정치하고 완벽하게 정의한 것. 그 정의에 대입하면 귀곡사든 장생이든, 아무튼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물론 그 정의의 문맥을 이해하려면 수학에 대한 이해와 조예,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처음에 어렵더라도 반복해 실습하고 점차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하면 되는 것인데, 그처럼 멋진 강병원 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필자는 지금도 강병원 룰을 전폭 지지한다.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작품이었다. 바둑과 수학이 이렇게 절묘하고 멋지게 만날 수도 있다는 느낌, 그 만남을 목격하는 일, 그건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판타지였다. 강병원 룰과 배태일 시스템이 만났으면 좋겠다. 그 두 가지가 합세하면 한국 바둑은 세계 최강다운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는 것 아닌가. 아니, 한 가지가 더 있다는 생각인데,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