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네 나오키 9단 | ||
얌전하고 냉정한 모범생 분위기의 씨에허는 지난해 1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1회전 마지막 판에서 한국 김지석 6단(21)의 4연승을 저지하며 첫 승점을 올리더니 두 달쯤 후 한국에 건너와 일본의 이야마 유타 9단(21), 한국의 김승재 3단(18), 일본의 야마다 기미오 9단(31), 한국의 윤준상 7단(23)을 연파, 거칠 것 없는 5연승으로 농심호텔 대회장을 침묵시켰다.
중국 랭킹 상위권이며 이미 세계무대에서도 평균 이상의 성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씨에허이긴 하지만 이렇듯 질주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산 회전에서 만난 네 명 모두 만만한 적수가 아니기 때문이었는데, 어떻든 무서운 기세였다.
첫 상대 이야마는 지난해 일본 바둑사상 ‘최연소 명인’ 기록을 세우면서 일본 바둑의 희망으로 떠오른 인물. 그러나 이야마는 불과 160수 만에 불계패, 아직은 세계무대 경험을 좀 더 쌓아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내려갔다.
김승재. 며칠 전 BC카드배에서 각각 이창호 9단과 중국 위빈 9단을 꺾어 파란을 일으킨 연구생 한태희, 나현과 함께 ‘무서운 고교생 3인방’으로 크게 한번 매스컴을 탔던 청소년. 한국 바둑의 샛별 가운데 하나여서 씨에허와도 박빙의 승부를 펼칠 것으로 예상했으나 아깝게 흑으로 1집반을 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야마다 기미오는 입단 초년 시절, 야마시타 게이고 9단(32·현 서열 1위 기성 타이틀 보유자), 다카오 신지 9단(34) 등과 함께 일본 차세대 ‘3인방’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이들 바로 위 선배가 하네 나오키 9단이다.
윤준상. 열네 살에 입단해 스무 살 때 이창호 9단을 꺾고 ‘국수’에 올라, 한국 바둑의 대통을 이을 것으로 촉망받던 젊은이로 기풍은 전투형. 요즘 주변으로부터 “날이 좀 무뎌졌다”는 얘기를 듣고 있는 터라 이번 대국이 심기일전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중반 막바지에서 대마 사활을 착각, 불과 152수 만에 단명국으로 불계패했다. 이래서 씨에허의 5연승.
5연승은 농심배 연승부문 타이기록. 씨에허는 4회 때 중국 후야오위 8단(28), 6회 때 한국 이창호 9단(36), 8회 때 중국 펑첸 7단(25), 9회 때 한국 강동윤 9단(21)에 이어 다섯 번째로 5연승 고지에 올랐다.
▲ 씨에허 7단(왼쪽)과 박영훈 9단. | ||
하나는 씨에허의 피로. 씨에허는 농심배 전, 1월 12일부터 16일까지 제2회 BC 카드카드배에 출전해 세 판을 둔 상태였다. 통합예선에서 두 판을 이겨 64강 본선에 올라갔다가, 본선 첫 판에서 한국 박정환 7단(17)에게 졌다. 17일 하루를 쉬고 다시 18일부터 23일까지 매일 한 판씩 여섯 판, 그러니까 1월 12일부터 23일까지 모두 아홉 판을 두었다. 씨에허의 6연승 신기록 수립을 저지하는 데에는 강행군 스케줄이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
중국 팀에서는 “5연승에서 일단 끝내고 두 달쯤 쉬었다가 3회전을 했더라면 씨에허의 연승은 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면서 못내 아쉬워했는데, 정작 무대에서 퇴장하는 씨에허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큰 짐을 내려놓았고, 소득이 적지 않았으니까. 씨에허는 BC카드배 상금과 농심배 대국료 및 연승보너스를 모두 합쳐 5100만 원을 벌었다.
또 하나의 승인은 하네의 ‘마음비우기’였다. 현 ‘본인방’ 타이틀 보유자이며, 한때는 서열 1위 ‘기성’이기도 했던 기사로서의 자존심과 체면, 게다가 일본 주장으로서의 부담감 때문에 속으로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점잖은 교수풍의 하네는 시종 담담했다. 그러한 평정심으로 하네는 박영훈에게도 완승을 거두었다.
하네는 부자(父子) 기사. 아버지가 하네 야스마사 9단(66)이다. 사카다 에이오 9단(90), 후지사와 슈코 9단(1925년생, 2009년 작고) 세대를 잇는 오다케 히데오 9단(68), 린하이펑 9단(68) 등과 비슷한 연배로 ‘빅3’는 아니지만 ‘왕좌’ ‘왕관’ 등의 기전에서 몇 차례 우승했던 실력파 기사다. 하네는 인물도 좋은 데다가 단정한 복장으로 대국에 임하는 자세가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또 한번 생각이 났다. 공식 대국에서, 더구나 국제적인 대회에서 우리 프로들은 왜 정장을 하지 않는 것일까. 형식보다는 내용, 외양보다는 실질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자.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법이다.
하네의 다음 상대는 중국. 하네가 더 많이 이겼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다음이 갈등이다. 하네가 중국을 이기면 이창호와 하네가 만나는데, 그것 참.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