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나 | ||
리나의 입단은 11세 4개월, 일본 바둑사상 최연소 기록이다. 종전 기록은 1968년 조치훈 9단의 11세 9개월. 그게 42년 만에 마침내 깨졌다. 42년 동안이나 깨지지 않았다는 것도 대단하고, 그것이 깨졌다는 것도 대단하며, 그런 기록들을 세운 사람들도 대단하다.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은 조훈현 9단(57)이 1962년에 세운 9세. 몇 개월까지는 기록에 없다. 조 9단은 입단 직후 일본에 건너갔고, 거기서 공부하다가 일본기원에서 다시 입단했으니 조금 애매한 부분은 있는데, 아무튼 9세 입단 기록은 42년이 아니라 48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요즘 어린 연구생들이 무서운 실력을 보이고 있으니 조만간 혹시 깨질지도 모르겠다.
리나의 아버지 후지사와 가즈나리 (46)도 프로기사로 8단이다. 3대 프로기사는 일본에도 흔치 않다. 일본 현대 바둑의 태두이자 무수한 제자를 길러내 일본 바둑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기타니 미노루(1909~1975) 9단의 가계가 3대 프로기사다. 딸이 레이코 7단, 레이코의 남편이 고바야시 고이치 9단(58)이고 이들 사이의 딸이 고바야시 이즈미 6단(33), 그리고 이즈미의 남편이 장쉬 9단(30)이다. 남편 고바야시 고이치 9단보다 열세 살이 위였던 레이코 8단은 몇 년 전에 작고했는데, 이상하게도 일본기원 홈페이지 기사인명록에 기록이 없다. 장쉬-이즈미 부부는 2003년 남편은 제58기 본인방, 부인은 제22기 여류본인방을 각각 차지해, 부부가 남녀 본인방을 제패했던 독보적 기록을 갖고 있다.
다케미야 마사키 9단(59)도 3대 프로기사. 장인이 프로기사였고 아들 다케미야 요코(33)가 현재 프로기사 5단으로 대를 잇고 있다. 관서기원 쪽은 현대 바둑 초창기에 활약했던 세키야마 9단 가문이 3대째 프로기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는 조남철 9단(1924~ 2006)→조상연 7단(69), 조치훈 9단(54) 형제→최규병 9단(47), 이성재 9단(33) 이종형제로 이어지는 3대 프로기사 가계가 있다. 조남철 선생은 조상연-조치훈 형제의 작은아버지이며, 조상연-조치훈 형제는 최규병-이성재 이종형제의 외삼촌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이들 3대 프로기사 가문들과 달리 후지사와 슈코→가즈나리→리나는 친계 3대다. 그러나 리나가 딸이니 앞으로 4대를 이어간다면 여기도 친계는 끝날지 모르겠다.
후지사와 집안의 4대째 프로기사를 기대한다면 리나가 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후지사와 슈코의 그 증손녀가 빨라도 열 살은 되어야 할 테니 지금부터 20여 년은 지나야 한다. 2030년대 중반, 그때까지도 일본에 프로기사라는 직업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아~ 그때쯤이면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해 있을 것인지. 그나저나 슈코 9단이 살아 있었으면 굉장히 기뻐했을 텐데, 아깝게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 고 슈코 9단(왼쪽), 가즈나리 8단 | ||
그리고 상금은 술값과 경마·경륜으로 날렸다. 도전기를 한두 달 앞두고는 술을 딱 끊고 운기조식했다가 도전기가 끝나면 시상식장에서도 취했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취했다. 여자 사회자에게, 스튜어디스에게 “아가씨, 참 예쁘네” 하면서 작업을 걸고, 돌아가면 부닥쳐 시달릴 빚쟁이들을 생각하다가 “에이, 이놈의 비행기, 떨어져 버려라”고 고함을 질렀다. 암 수술을 받은 후에도 타이틀을 땄는데, 그래도 돈은 늘 부족했다. 돈이 궁해지자 일본기원의 허락도 없이 자신이 아마추어 단증을 팔았고, 그러다 제명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생활인으로서는 한심한 일들이었건만, 그런 게 전혀 나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술값에, 노름빚에 시달리고 하는 것들도 다 남자다운 행동으로 보였다. 하긴 술이 뭐가 나쁘랴. 노름도 하면 좀 어떠랴. 기껏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 그걸 또 하지 말라고 말리는 세상이 우스운 것이지. 우칭위엔(95)이나 기타니 같은 사람들의 구도자적 삶과 후지사와의 술과 노름의 삶이 다르긴 하지만 그 또한 나름대로 한 인생이다. 바둑에 관한 한 뭔가를 보여 줬다는 측면에서 같은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리나에게 기대를 하는 모습이다.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니 혹시 대단한 기재 아닐까. 할아버지가 보여 주었던 호방하고 독창적인 바둑을 손녀 리나가 재현하는 것은 아닐까. 타이틀할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더 많은 걸 배우고 물려받을 텐데, 그게 안 되는 것이 아쉽다. “타이틀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리나의 말이 당차다. 일본 여류 전관왕 씨에이민 4단(21)의 적수는 열 살 아래인 리나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교육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대개는 모정(母情)이 뒷받침하고 있지만 단 하나 바둑은 ‘부정(父情)’이다. 조훈현도 서봉수도 유창혁도 모두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웠고, 이창호는 할아버지 손을 잡고 다니면서 배웠다. 목진석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 등등에서 김지석 박정환까지 모두 아버지가 바둑의 길로 안내했다. 부정이 참담해진 세상이지만 바둑은 아직은 아니고, 리나는 국적을 떠나 작은 위안이다. 가즈나리 8단은 리나가 얼마나 예쁠까.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