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단한 활약 초라한 귀국길 이창호가 농심배를 끝내고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던 날 팬클럽 10여 명이 환영하는 모습. 그의 대활약에도 불구하고 한국기원의 환영행사가 없는 것에 대해 네티즌들이 꼬집기도 했다. | ||
“하하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 다 먹여 살린다니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함께 웃었다. 사실은 그 바둑팬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놈’이라고 말했었다. 물론 그가 말한 ‘놈’은 결코 욕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먹여 살리는’ 현실이 너무 재미있고, 신기하고, 조금 시니컬한 기분도 들고, 그 ‘한 사람’이 너무 고맙고, 대견하고, 존경스럽고, 아니 외경스럽고 그래서 그런 건데, 그런 복잡미묘하고 가슴 뭉클한 감정을 ‘한 사람’이라고 하면 실감이 떨어지고, 전달이나 공감도 잘 안 되고….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시쳇말로 대한민국에서 바둑계의 국보 이창호 9단을 ‘놈’이라고 할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니까.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보름 전에는 박지은이 혼자 4연승으로 끝내줬잖아!”
“그게 어디 바둑뿐이야? 피겨에서는 김연아 혼자 금메달 땄잖아.”
스케이팅은 김연아만 아니었다. 모태범, 이상화, 이승훈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다만 김연아는 독보적이었고, 아름다웠고, 불멸의 기록을 세웠고, 전 세계가 기립박수를 쳤다. 그래서 김연아 혼자라고 조금 과장해서 강조한 것뿐이었다.
현 정권은 정말 운이 좋다는 말도 했다. 정치 쪽은 저리도 울울하고 지리멸렬인데, 그럴 때마다 우리 청년들이 나라 바깥에서 대박을 터뜨려 준다는 것이었다. 비단 이번뿐이랴. 박찬호, 박세리, 박태환도 혼자 우리를 먹여 살렸다. 그러고 보니 죄다 박씨다. 축구엔 박지성, 박주영. 바둑엔 또 박정환.
특히 박세리의 감동은 지금도 말들을 한다. IMF의 재앙이 우리를 덮쳐 모두들 절망의 그림자에 전전긍긍할 1998년, US여자오픈에 출전한 박세리의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늪에 빠진 공을 치러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던 박세리의 모습. 그때 박세리의 시커먼 종아리와 하얀 발목은 정말 많은 사람을 울렸다.
이번 이창호의 대역전 드라마를 보면서는 남자들이 많이 눈시울을 훔쳤다. 30대 장년도 그랬고, 50대 중년도 그랬다. 바둑과 스포츠의 드라마와 일상의 현실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그랬을 것이다. 카타르시스다.
이창호가 중국의 세 명을 모두 꺾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령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이창호에게 베팅한 사람보다 중국 쪽에 베팅한 사람이 많았다. 류싱은 몰라도 구리는 만만치 않은 상대이고, 창하오는 전에는 이창호에게 밀리기만 했지만 근자에 와서는 오히려 계속 이창호를 이기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창호는 결전에 앞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말했고, 두통이 좀 심하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중국 세 명을 모두 불계로 보냈다. 감동이 배가된 것은 그래서이고, 스타는 그래서 스타였다. 스타는 승률이나 타율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타의 제일 조건은 역경의 드라마인 것.
최근 1~2년 사이 구리와 콩지에의 활약에 크게 고무되어 이번 단체전에서도 자국의 승리를 기대했던 중국 언론도 이창호의 3연승을 보고는 대서특필로 “이창호의 별명이 전에는 석불(石佛)이었는데, 그 석불이 이제 독불(毒佛)로 변했다”면서 새삼 기량과 투혼을 경탄해마지 않았다. 이창호는 원래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다. 인품과 기풍이 그들의 성향에도 잘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둑계 일각에서는 “이번 농심배에 중국 콩지에가 빠진 것이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류싱 자리에 콩지에가 있었더라면 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을 것”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거야말로’ 배부른 투정일 터.
아쉬움을 말하자면 콩지에가 빠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창호가 귀국하던 날 인천공항이 쓸쓸할 정도로 조용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창호의 팬클럽 ‘두터미’의 회원 10여 명이 ‘아름다운 청년 이창호’이라는 펼침막을 들고 환영했을 뿐이다. 날카로운 누리꾼들이 이걸 놓치지 않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그렇다. 누리꾼들의 말마따나 한국기원은 왜 좀 더 멋지게 이창호를 환영해 주지 않았을까. 또 농심배에 참여했던 다른 후배 기사들은? 이창호가 3연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준비를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창호가 이기는 건 옛날부터 자주 보아오던 일이라서 그런 것인지.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