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중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바른노동조합 위원장
국가 과학기술을 책임지는 국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기관장이 하나의 권력을 추구하는 자리로 전락되고 있다. 각 출연연 기관장에게는 국가와 국민이 부여한 기관의 고유 임무를 수행할 권한과 책임이 함께 부여되므로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역량을 갖추고 기관을 발전시킬 철학과 의지가 강한 사람이 기관장으로 선임돼야 한다. 그런데 출연연 기관장 선임절차에 따라 공정한 기관장 선임을 보장해야 할 국가과학기술연구회(연구회)가 오히려 이를 무시하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기관장을 선임하고 있어 무늬만 공모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번 한국표준과학연구원(표준연) 원장 선임은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1, 2차 공모가 적임자 없음이라는 결론으로 무산됐고 3차 공모에서 결국 예상됐던 연구회 이사 출신의 외부인사가 최종 선임됐다. 보통 2개월 정도 소요되는 총 공모 기간이 1차 40일, 2차 17일 및 3차 23일로 턱없이 짧았고 1개월 이상 걸리는 3배수 후보자 검증 기간은 1차 7일, 2차 3일, 3차 5일로 검증이 불가능한 기간이므로 결국 이번 공모는 내정된 외부인사를 선임하려는 짜여진 각본에 따라 진행됐음이 명백하다. 즉 1, 2차 공모는 어짜피 무산시킬 계획이었으므로 검증할 필요가 없었으며 3차의 경우도 내정된 인사를 선임하면 되기 때문에 굳이 검증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리한 공모절차는 몇 가지 커다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문제점은 공정성이다. 1, 2차 원장선임 공모를 무산시킨 것은 유능한 내부인사들을 미리 배제하기 위한 의도밖에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다. 역량 있고 경영 전반에 대한 준비로 기관장 의지가 강한 사람은 대부분 1차에 지원하므로 원장선임 무산을 통해 전문성과 경쟁력이 강한 다수의 내부인사들을 미리 걸러내면 전문성이 약한 외부인사라도 어렵지 않게 기관장에 선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비정상적인 이사회 소집이다. 기관장 선임을 위해서는 제적위원 15명의 과반인 8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므로 충분한 수의 이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이사회 일정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1차에 9명, 2차에 8명의 이사만이 참여해 거의 모두가 찬성해야 하므로 기관장 선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이사회 소집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세 번째 문제점은 도의성이다. 신임 원장은 3차 공모 직전에 연구회 이사회 이사직을 사퇴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출연연을 총괄 관리하는 상위기관이고 그 이사회는 출연연 기관장 선임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위치다. 기관장 선임 절차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지켜야 할 이사회 이사가 스스로 기관장 후보가 되는 것은 “셀프선임”으로 매우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일이다. 설사 기관장으로 내정되지 않은 자발적 지원이라 하더라도 연구회 이사의 후보 지원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꼴이므로 도의적 측면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출연연의 유능한 내부인사들을 완전한 들러리로 전락시킨 무늬만 공모인 이런 기관장 선임 절차는 출연연 직원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로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침체돼 있는 연구 현장을 더욱 위축시킬 것이다. 정년, 연금 및 복지 혜택 등에서 대학교수들에게 크게 불리한 상황에서 기관장 자리마저 불공정한 방법으로 정치교수 등의 외부인사가 차지한다면 출연연 연구원들의 상실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는 연구 동기를 저하시켜 연구 생산성을 떨어뜨릴 것이며 연구 환경을 더욱 황폐화시킬 것이다. 또한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통해 선임된 기관장은 정부의 정책 시행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기관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정책일지라도 반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훌륭한 기관장 선임은 국가출연연구기관이 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외부인사의 출연연 기관장 선임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기관 운영에 필요한 전문성과 기관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확실한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부든 외부든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만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고 기관장에 요구되는 여러 자격 요건을 심층적으로 검증해 유능한 기관장이 선임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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