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윤영미, 나승남, 안향미 | ||
#장갑 네 켤레 구멍 난 사연
해마다 이맘때면 KIA의 경기를 보기 위해 나주 집을 떠나 광주 아들집에서 머문다는 삼진 할머니. 파란 블라우스와 흰 장갑은 할머니의 트레이드마크다.
“한 경기 보고 나면 흰 장갑 네 켤레가 구멍이 나요. 어찌나 박수를 세게 쳤는지…. 한번은 이종범 선수가 너무 고맙다고, 손이 고생한다며 장갑을 선물해준 적도 있어요.”
자신이 화장실에 갈 때마다 상대팀 선수가 안타를 친다는 징크스가 있어서 아무리 볼 일이 급해도 수비 때는 자리를 지킨다는 할머니는 이제 광주 팬들에게는 비공식 응원단장이나 마찬가지다.
자녀들이 장성한 2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평일ㆍ주말을 가리지 않고 경기장을 찾는다는 삼진할머니가 야구에 이렇게 푹 빠지게 된 데는 사뭇 진지한 역사의식까지 배어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삼엄했던 광주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답답한 마음을 풀 해방구로서 야구장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군부독재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예요. 어디 가서 시원하게 말도 못하겠고 답답해 죽겠는데, 야구 경기장에 가면 시원하게 욕을 할 수 있겠더라고요. 가서 ‘김대중’ 대신에 ‘해태’를 외치면서 마음껏 울 수도 있으니까…. 처음엔 답답한 마음 풀러 갔던 거죠.”
할머니가 말하는 야구의 가장 큰 매력은 ‘감동’이다. 음지에 있던 선수들이 어느 순간 성장해 기록을 경신해가며 박수갈채를 받을 때, 그 순간 밀려오는 마음의 울림은 여느 주말연속극보다 절절하다는 것이 할머니가 밝히는 관전 포인트다.
“김상현이 2군에서 9년 동안 있다가 KIA에 오면서 홈런을 그것도 만루 홈런을 쳤잖아요. 그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부인을 예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2군에 있는 동안 그렇게 사람이 말라가더라고요. 그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을까 헤아려 보면 늘 내 가슴이 아팠는데, 홈런 친 그 순간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 내가 그 재미에 여태껏 야구 응원하잖아요.”
#야구가 인생이다
“야구로 인해 사람을 배우고 사람을 얻었다”고 말하는 국내 1호 여자야구선수 안향미. 서른 살까지 18년이란 시간 동안 그의 삶을 가득 채웠던 야구이기도 하다. ‘보는 시간’보다 ‘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그에게 야구는 단순히 재미있는 오락이나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아닌 희로애락이 닮긴 삶 자체다. 여자야구선수를 받아주는 구단이나 팀이 전무하던 시절, 그가 여자의 몸으로 배트를 쥐고 글러브를 끼게 된 건 순전히 ‘폼 나는’ 유니폼 한 장 때문이었다.
“남동생이 먼저 야구를 시작했어요. 나는 아버지 뜻에 따라 같이 시작하게 된 거고요. 그런데 며칠 해보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더군다나 여자선수라고는 저밖에 없는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안 하겠다고 말하러 연습장에 갔는데 벌써 제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이 나와 있는 거예요. 너무 멋있더라고요. 그냥 ‘비싼 돈 주고 맞춘 걸 버리는 건 아깝겠다’며 마음을 먹고 시작한 게 삶의 절반을 이어온 거죠.”
그렇게 반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야구를 시작했지만 남자들과 함께 섞여 훈련을 받는다는 게 쉬울 리는 없었다. 그저 ‘이기고 싶다’는 승부욕과 오기가 마운드 위에 남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저러다 포기하겠지, 언젠가는 나가겠지’하는 주변의 시선을 이겨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받아주는 대학 팀이 없었다. 고민 끝에 계속해서 공을 던질 수 있고 칠 수 있는 곳으로 배낭 하나 둘러메고 타국으로 떠났다. 국내에선 받아주는 곳도 없는 천덕꾸러기 여자선수였지만 미국, 일본, 호주 팀에서는 그를 눈여겨보고 러브콜이 쏟아졌다. 물론 그런 대접을 받기까지는 또 순탄치만은 않은 과정을 지나야 했다.
“처음에 미국 여자야구팀에서 같이 한번 뛰어보자고 초청장이 왔어요. 서둘러 비자를 준비하는데 한국에 여자야구선수가 어디 있냐며 대사관에서 비자를 거절하는 거예요. 2년을 더 준비한 끝에 일본의 한 여자야구 팀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는데 또 한국의 여자야구선수라는 점이 막히더라고요. 대사관 직원이 직접 저희 집에 찾아와서 부모님까지 만나보고서야 비자가 나오더라고요.”
처음 눈밭을 걷는 이의 신발이 가장 많이 젖듯이, 누구도 밟아본 적 없는 길을 내가는 과정이었지만 그는 덕분에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 팀에 있을 때 아르바이트 두 개를 해서 겨우 생활비와 학비를 메웠는데 막판에 학비 30만 엔이 없어서 학교 졸업을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됐어요. 부모님도 경제적 지원을 해주실 형편이 못돼서 할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오려는데 같은 팀 선수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제 학비를 대신 내준 거예요. 단지 조금이라도 더 함께 그라운드를 뛰고 싶다는 이유로요. 아무 조건을 붙이지도 않았죠.”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한국여자연맹을 만들고, 지인들을 수소문해 ‘비밀리에’라는 여자선수단을 만들었다. 지금은 전국 8개 팀이 운영 중일 정도로 여자야구가 활성화된 요 근래, 그녀는 다시 ‘선라이즈’란 팀을 꾸려 올해 열린 홍콩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내기도 했다.
#금녀구역에 첫발 내딛어
안향미와는 또 다른 야구 가시밭길을 걸어 온 국내 1호 프로야구 여성캐스터 윤영미 아나운서. 지금이야 여성아나운서들이 스포츠방송에 출연하는 게 낯설지 않지만 그가 마이크를 처음 쥐었던 1994년 당시만 해도 야구중계는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다. 3~4시간 이어지는 야구경기의 특성상 체력이 받쳐주는 남자가 제격이라는 선입견과, ‘여자가 야구를 뭘 알아’하는 식의 편견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때였다.
그렇다고 그가 유독 야구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투수는 공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메모할 정도로 야구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던 그가 처음 야구중계에 도전하게 된 것은 서른 셋. 아나운서로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는 야구중계가 누구도 밟아본 적 없는 불모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으로 보였던 것. 물론 그만큼 험난한 길이었다.
“경기 전에 선수 인터뷰를 하러 더그아웃에 내려갔는데 어떤 감독이 ‘에잇, 여자가 재수 없게’라고 말하는 거예요. 기분이 너무 나빴지만 ‘양 팀 다 들락날락거리니까 감독님만 재수 없지는 않을 거예요’라며, 그럴수록 더 보란 듯 운동장을 누비고 다녔죠.”
그랬던 그도 야구 규정집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공부하고 전지훈련, 원정경기, 시범경기 할 것 없이 한 시즌을 부지런히 돌아다니자 마운드를 보는 눈이 사뭇 날카로워질 수 있었다.
야구가 전혀 재미있지 않은, 남자친구 손을 잡고 억지로 따라 온 여자들에게 윤영미 아나운서의 전하는 관전 포인트는 자신의 ‘아바타’ 선수를 만들어 보라는 것.
“한 선수가 성장하는 모습을 꾸준히 지켜보며, 매 시즌마다 어떤 슬럼프를 겪고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 자기 인생과 대비시켜 지켜보면 야구의 맛이 배로 느껴질 거예요.”
* 나승남은?
KIA 타이거즈 팬이라면, 광주에서 야구 좀 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녀(?). KIA의 전신인 해태 시절부터 단 하루도 빠짐없이 광주 경기장을 찾아왔다는 삼진할머니의 트레이드마크는 파란 블라우스와 흰 장갑이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삼진’을 외치며 상대팀의 맥을 풀어 놓는 KIA의 원조 골수팬이자 비공식 응원단장.
* 안향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해 남자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했었다는 안향미.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받아주는 대학팀이 없어 여자야구팀이 있는 일본, 미국, 호주를 돌아다니며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2004년 일본 여자야구팀을 나와 귀국, 한국여자야구연맹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그녀는 ‘비밀리에’라는 팀을 만들어 감독으로 데뷔한 바 있다. 최근에는 다시 ‘선라이즈’라는 팀을 꾸려 감독으로 활약했다.
* 윤영미는?
금녀의 구역이었던 프로야구 캐스터 자리에 차음으로 깃발을 꽂은 그녀. 지난 1993년 리포터부터 시작해 1994년~2000년까지 여성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프로야구 중계를 맡으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잊지 못할 ‘그때 그 순간’
윤영미와 양준혁 얼레리 꼴레리?
두터운 친분 탓에 빚어진 오해
양준혁과의 스캔들 아닌 스캔들까지 있었다는 윤영미 아나운서. 한 번은 전지훈련에서 돌아오는 그를 공항으로 마중 나갔는데, 백인천 감독이 둘의 관계를 의심해 뒷조사까지 시킨 일이 있단다.
당시 일본의 경우 연상의 여자 아나운서와 남자 선수가 사귀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는 터라 구단도 팬들도 둘의 스캔들에 초긴장 상태였다고. 실상은 번번이 인터뷰를 거절당하며 갖은 고초를 겪는 그라운드 위 여자리포터의 고초가 안쓰러워 양준혁이 이런 저런 도움을 주다 서로 친분이 쌓였던 것. 양준혁과는 아직도 좋은 여자 있으면 가장 먼저 소개시켜 주는 ‘절친’이다.
안향미 “승짱(이승엽) 최고!”
안향미는 일본팀에 있을 때 이승엽이 자신은 물론 팀원 전체에게 도쿄돔 구경을 시켜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규정 상 관계자나 특정관광객에게만 개방할 수 있지만, 같은 경상도 출신인 이승엽이 자신을 알아보고는 구단관계자들을 설득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인데~”하며 정겨운 부산사투리를 건네고, 경기 시작 전 후다닥 뛰어와 스무 장의 카드에 일일이 사인을 해주던 이승엽은 야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씨도 곱다며 일명 ‘승빠’임을 자처하는 그녀다.
삼진할머니 “장성호 엄마 아닌디?”
장성호와 쏙 빼닮은 얼굴 때문에 팬들로부터 시즌마다 장성호의 ‘숨겨놓은(?) 엄마’라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는 삼진할머니. “장성호 엄마 아닌디?”하고 부정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진땀을 뺀 일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알고 보면 장성호가 은근히 무덤덤한 스타일이라 다가가기도 힘들단다. 그래도 장성호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어머니 못지않다. 부상에 성적부진에 시달리는 장성호라도 절대 다른 구단에 내줄 수는 없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데서 삼진할머니의 굳은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