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A 김주일 씨, 두산 오종학 씨.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10번타자로 응원석에 서다
현재 각 구단의 응원단장들은 대부분 한때 운동선수를 꿈꿨던 체육학과 출신들. 대학시절 재미삼아 응원단에 가입했다가 그 짜릿한 ‘맛’을 보고 경기장 바깥 자리를 평생 업으로 삼게 된 것.
광주가 고향인 KIA 타이거즈 응원단장 김주일 씨(34)는 KIA 타이거즈 골수팬으로 대학 시절부터 응원단 활동을 하며 응원 맛에 푹 빠지게 됐다. 졸업 후 이벤트업체에 소속돼 수차례의 오디션을 본 끝에 기아의 10번 타자가 될 수 있었다. “해마다 시즌 초만 되면 프로야구 응원단석에 처음 섰던 25세 때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김 씨는 벌써 9년 차의 베테랑 응원단장이다.
여자농구부터 시작해 남자농구, 배구리그를 모두 섭렵한 후 프로야구 응원단장이 된 ‘노력파’도 있다. 히어로즈 응원단장 심윤섭 씨(33)는 구기종목 응원단장만 10년 차인 베테랑이다. 심 씨는 “여자농구에서 시작해 남녀 프로농구, 배구 팀에서 응원 감을 익힌 후 야구장 응원단상에 섰다”며 긴 노력 끝에 얻은 자리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프로야구 응원석에 서기 위해, 속된 말로 응원단장을 하고 있는 선배들에게 열심히 들이댔다”고 말하는 두산 베어스 응원단장 오종학 씨(28) 역시 오랜 시간 프로야구 응원석을 노크해 온 이 중의 하나다.
그는 대학시절 농구 응원단장석에 서 본 후 응원의 세계에 눈 떠 3년 동안 동문 선배들에게 공석이 생기면 자신을 불러달라고 꾸준히 문을 두드린 결과 2008년 시즌부터 두산 베어스 10번 타자가 됐다.
그런가 하면 특별한 끼와 재능으로 단숨에 프로야구 응원단장이 된 경우도 있다. 삼성 라이온즈 응원단장 김용일 씨(33)는 대구에서 백댄서와 이벤트 업체 MC로 활동하다 이름이 알려져 삼성 라이온즈 구단관계자의 러브콜을 받았다.
“대타로 응원단상에 서 마음 편하게 망가지고 왔더니 관객들 호응이 좋았다”는 LG 트윈스 응원단장 강병욱 씨(30). 2007년 선배의 빈자리를 메우러 투입된 그는 부담 없이 한바탕 즐기고 간 것이 관객들과 구단 관계자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겨 2년 후 공석이 생기자마자 러브콜을 받고 지난 시즌부터 활동하게 됐다.
▲ 삼성 김용일 씨.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
8개 구단 응원단장의 자리는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유지하기도 힘든 자리다. 경기성적과 관중 호응 정도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데다 스스로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버텨낼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원단장들은 자신을 ‘파리 목숨’이라 표현하며 매 시즌 자신의 자리를 지킬 비장의 무기를 준비한다.
그중에서도 응원단장의 능력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선수 응원가. 두산베어스 응원단장 오종학 씨는 “다양한 연령의 야구팬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기본이고 선수들의 성격과 특징에도 맞아야 한다”며 만인을 만족시킬 만한 곡 선택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전한다. 이런저런 기준으로 거르다보면 선택할 수 있는 곡이 손에 꼽혀 상대팀 응원가와 겹치는 일도 많아 팬들 사이에서 ‘응원가 원조경쟁’이 불붙기도 한다. 그래서 평소 클래식부터 오케스트라까지 모든 장르의 곡을 두루 들으며 후렴구마다 선수이름과 소속 구단 이름을 넣어서 불러보는 것이 응원단장들이 말하는 ‘직업병’이다.
KIA 타이거즈 응원단장 김주일 씨는 “이동 중에 거리에서 이 음악이다 싶은 것이 들리면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도 길을 멈추고 꼭 제목을 알아내고 간다”고 말한다. 새로 영입되는 선수가 있을 때 야구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름에 받침이 덜 들어간 선수들이 영입되길 내심 바라기도 한다.
LG 트윈스 강병욱 응원단장은 “이택근 선수가 이번에 LG로 왔는데 딱딱 떨어지는 ‘ㄱ, ㄴ’자 발음 때문에 응원가 찾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호소한다. “팀의 이름이 자주 바뀌는 것이 고민이다”라는 심윤섭 씨는 히어로즈의 응원단장을 5년간 연임해 오며 “현대에서 우리, 넥센까지 팀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뀌다보니 응원가를 한 번 만들면 최소 3년은 쓴다는 다른 단장들이 가끔 부러울 때가 있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다.
어렵게 선곡을 끝내도 자신의 곡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선수들도 있어 애간장이 녹기도 한다. 삼성 라이온즈 응원단장 김용일 씨는 “김상수 선수의 안타송이 노라조의 슈퍼맨을 개사해 만든 ‘상수야~ 안타를 날려주세요~’인데 진갑용 선수가 이 노래를 자신의 안타송으로 하고 싶다며 경매를 붙이자고 제안했다”며 선후배 사이에서 응원곡을 두고 거래가 오고가는 웃지 못 할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전한다.
사석에서 조용히 자신의 안타송에 대해 의논하는 선수들도 많다. 박용택은 혼다 CF음악을 가져와 ‘이 음악이면 홈런이 빵빵 터질 것 같다’며 직접 선곡하기도 했다. 어떤 선수는 ‘헤어진 여자친구가 좋아하던 곡이라 경기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또 ‘동요 같은 노래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니 쑥스러워 몸에 힘이 빠진다’고 트로트 곡으로 바꿔달라고 부탁하는 선수들도 있다.
▲ 넥센 심윤섭 씨, LG 강병욱 씨. 사진제공=LG 트윈스 | ||
프로야구가 최고의 인기를 얻게 되자 응원단장들도 선수들 못지않은 성적 부담감을 안는다. 그래서 사소한 습관도 경기결과와 연관시킬 만큼 신경을 쓴다. 말하자면 저마다의 시즌 징크스를 안고 있다는 것.
삼성 라이온즈 응원단장 김 씨는 시즌마다 결벽증에 걸린다. 응원단장을 맡은 지난 10년 동안 경기 전 속옷부터 손톱까지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관리한다. 그런 날은 왠지 경기도 깔끔하게 풀렸던 것 같은 마음에서다. 두산 베어스 응원단장 오 씨는 두산 베어스 로고가 새겨진 목걸이를 매고 경기장에 나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목걸이를 매지 않고 응원하는 날은 두산이 지는 징크스가 있기 때문이다. KIA 타이거즈 응원단장 김 씨는 배고픈 응원을 자처한다. 공복 상태로 응원해야 절박한 응원이 나오는 데다 자신이 뭐라도 먹고 응원한 날은 꼭 KIA가 졌기 때문이다. LG 트윈스 응원단장 강 씨는 지는 날 착용했던 장갑은 나쁜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는 습관이 있다.
응원단장의 진가는 팀이 연패에 빠졌을 때 드러난다. 팀이 연승을 거둘 때는 별 어려움 없이 응원을 주도하지만 도저히 역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순간 “만루 홈런 보고 가셔야죠”라며 간절한 목소리로 자리를 떠나려는 관객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 하는 것이 응원단상 위 10번 타자의 역할이다. 그러다보니 갖은 위급한(?) 상황에서 갖가지 퍼포먼스를 벌이게 된다.
히어로즈 응원단장 심 씨는 “홈구장에 5명의 팬들만 남은 상태에서 응원을 주도한 적이 있다”며 “어웨이 팬들이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결국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후 미친 듯이 막춤을 추며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고 에피소드를 전한다.
삭발을 단행하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던 응원단장도 있다. LG 트윈스 응원단장 강 씨는 “지난 시즌 팀이 8연패에 빠졌을 때 머리를 빡빡 깎기도 하고 걸 그룹 댄스를 익혀 응원 열기를 높이려 고군분투했다”고 말한다. 그의 노력을 본 한 홈팬은 자신의 블로그에 “강병욱을 대타로 보내면 홈런 한 방 치고 올 거 같은 기세였다”고 그의 열띤 응원을 극찬하기도 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