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26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위해 준비한 메모지. 평소 연설 때 단어 취사선택에 매우 심혈을 기울인다고. 청와대사진기자단 | ||
최근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전직 대통령들의 예를 반면교사를 삼아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시각과 “향후 정계개편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입지구축”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요즘 속내가 이성과 참을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 아니겠느냐”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과연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노 대통령의 흉중과 속내는 무엇일까 짚어보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격한 발언은 지난 12월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상임위원회 자리에서 신호탄을 울렸다.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 중에는 특히 고건 전 총리를 겨냥한 내용이 주목을 끌었다. 노 대통령은 “고 총리가 다리가 되어 그 쪽(사회지도층)하고 나하고 가까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총리로 기용했었다”며 “하여튼 실패한 인사다.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였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고 전 총리를 비판한 데 이어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에 대해서도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링컨 대통령의 포용 인사가 제가 김근태 씨나 정동영 씨를 내각에 기용한 그 정도하고 비슷한 수준”이라며 “링컨 대통령 책에 오래 오래 남고 남들이 연설할 때마다 그 분 포용인사 했다고 인용했는데, 저는 비슷하게 하고도 인사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고 사니까”라고 털어놨다.
이러한 발언이 나오자 정치적인 발언은 자제해 오던 고 전 총리도 “노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며 자기부정”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한 당연한 결과”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12월 26일 국무회의에서 다시 “매우 섭섭하고 때로는 분하다” “사람도 뒷모습이 좋아야 한다”며 고 전 총리를 겨냥해 원색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특히 노 대통령이 “나는 과거 김대중 대통령을 비방하거나 비판해서 말한 일이 없다”며 “대선후보 시절 대통령과 차별화를 부추기던 사람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김 전 대통령을 변호했다”고 말한 것은 고 전 총리 외에도 다른 여당 내 대선주자군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는 분석이다.
노 대통령이 현 여권의 대권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고·김·정’을 한꺼번에 비판한 것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의 ‘치밀한 계산’이 담긴 발언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고건 전 총리와 신당파의 결집을 사전에 막고 여론몰이를 하려는 속내가 담겨있다는 것.
실제로 노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각을 세운 이후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겠느냐는 일부 전망도 있었지만 여론조사 결과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이 오히려 하락하는 양상을 보이자 노 대통령의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난 26일 CBS와 리얼미터의 공동여론조사에서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은 한 주 전에 비해 3.9%포인트 떨어진 9.8%를 기록했으며 처음으로 10% 아래로 하락했다. 이어 27일 리서치앤리서치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은 20일 11.5%에 비해 떨어진 10.7%였다. 한길리서치의 조사(23~26일)에서만 17.2%의 지지율을 기록해 이전 조사보다 2%포인트가량 올랐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지난 26일 국무회의에서 “고건 전 총리에 대해 ‘두 번 세 번 해명했음에도 전혀 미안하다는 기색이 없다’고 언급한 것 또한 자신이 이슈를 만들어놓은 판으로 고 전 총리를 끌어들이려는 속내 아니겠느냐”고 내다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남경필 의원은 “판을 흔든 뒤 상황을 봐서 대선 전략을 찾으려는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여권의 정계개편이 미묘해지고 있는 시점에 나온 것도 분명 계산된 노림수가 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노 대통령이 차기 정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분 마련’의 수순이라는 것. 여기엔 신당파와의 확실한 ‘선긋기’를 통해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한 친노 의원 측은 “최근 노 대통령이 내놓고 있는 발언 속에는 사수파의 의견을 대변한 것이 많다”며 “노 대통령으로 인해 여권 내 친노 세력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진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반면 노 대통령의 ‘막말’에는 그의 편치 않은 심기가 정화되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최근 여권의 대권주자들로부터는 물론 참여 정부에 몸을 담았던 전직 관료들의 움직임에서 흡사 ‘배신’과도 같은 느낌을 받은 노 대통령이 화를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다 도를 지나친 것이라는 이야기다. 노 대통령의 지난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상임위원회 연설에서는 대통령의 신분으로는 쉽게 담기 힘든 거친 발언들이 다수 쏟아졌다. ‘흔들어라 이거지요’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 ‘미국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 ‘뺑뺑이 돌린다’는 등 불편한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낸 말들로 가득찼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거친 발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2월 27일 부산 북항개발 보고회에 참석한 뒤 오찬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언론과 재벌, 검찰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발언을 내놓았다. “정부에서는 검찰이 좀 센 편이고, 정부 바깥에서는 아무래도 제일 센 것이 재계고 그 다음이 언론이지 않나”라고 언급한 데 이어 “재벌회장이 구속되면 언론사가 재미 보는 구조 위에 있지 않느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연이은 노 대통령의 격정 발언에 대해 유인태 의원은 “(노기를) 아직 덜 뽑아 올린 것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치 분석가들에 따르면 임기말 대통령들은 대부분 정서상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유 의원도 “임기 말기엔 김대중 전 대통령도 측근들에게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심기 관리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더구나 노 대통령처럼 지지율이 10% 정도에 머물게 되면 배신감과 불안감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평소 연설 습관을 잘 아는 사람들은 노 대통령이 결코 화를 참지 못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화를 참지 않음으로써 국면을 돌파하려 한다고 보고 있다. 즉 노 대통령의 전매특허는 ‘야성’이며 이 야성을 되살리는 것이 세력을 재결집하고 상대방을 제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의 일련의 발언이 현 시점에서 우군과 적군을 확실히 구별해 정면에서 승부를 내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공연히 좌고우면하다가는 아군의 신뢰를 잃고 대선주자들의 세몰이에 휩쓸려 레임덕을 넘어 ‘식물 대통령’의 자리로 밀릴 가능성을 인식한 것이라는 얘기다.
노 대통령은 ‘기록관리’에 철저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노 대통령은 머리속에 떠오른 것들은 빠짐없이 메모해 놓고 심지어 연설 직전까지 원고에 손을 댈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한다. 지난 26일 국무회의 모두발언 내용을 준비한 메모지가 공개되어 눈길을 끌기도 했듯, 노 대통령은 평소 중요연설이 있을 때마다 단어의 취사선택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이 측근들이 설명이다. 참여정부 초반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을 지낸 이진 씨가 쓴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을 통해 “언론에서는 막말이나 말실수로 도마 위에 오른 것들이 실은 준비된 것들이기 일쑤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치밀한 계산속’과 ‘특유의 감정적 언행 표현’이 맞물린 노 대통령의 ‘격정발언’은 본격적인 대선정국을 앞두고 여야의 대권주자들에게 대응전략을 곱씹게 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