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여당 지도부와의 오찬 때 노무현 대통령 얼굴을 그래픽 처리한 것. 청와대사진기자단 | ||
정치권 일각에선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재집권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개헌 카드를 띄운 게 아니냐는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더구나 개헌 제의가 거부될 것을 예상치 못했을 리 없는 노 대통령이 이미 그 대비책을 마련해 놓았을 것이란 이야기마저 떠돌기 시작하고 있다. 언제든 초대형 태풍으로 변할 수 있는 개헌 카드의 숨겨진 폭발력과 노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정치판 뒤집기’ 시나리오를 추적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9일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의하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한마디로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평했다. 이 말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설전을 주고받았지만 정계에서는 이 말이 순식간에 유행어가 돼 버렸다. 노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던진 개헌 제의가 갖는 폭발력을 야당의 입장에서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이 던진 승부수는 그만큼 강하게 정치권을 강타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노 대통령이 작심하고 던진 승부카드인 만큼 정치권 전체가 또다시 대공황 속으로 빠져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당 진로 및 정계개편 문제로 사분오열될 조짐을 보였던 열린우리당내 제 계파는 일순 결집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한나라당 등 야권은 예기치 못한 제안에 대해 ‘정치공세’로 치부하면서도 그 파장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개헌 카드 이면에 ‘여권 결집, 야권 분열’이라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노림수가 드디어 가시화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지율 급락과 여권 분열 등으로 ‘조기 레임덕’에 직면했던 노 대통령의 숨겨진 복심은 차치하더라도 개헌 카드 한방으로 정국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개헌카드의 위력은 예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야권의 강한 반발과 싸늘한 민심의 벽에 부딪히면서 개헌의 동력이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 직후 각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들 대부분이 설령 개헌에는 찬성하더라도 시기가 적절치 않아 정략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국민들의 반응 앞에서 개헌 카드는 급격히 힘을 잃기 시작했다. 11일 청와대가 초청한 자리에 야 4당이 일제히 불참했다. 여권에서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언론사 중 당초 개헌에 찬성 의사를 보였던 <한겨레>도 ‘여론지지 없으면 접는 게 순리’라며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정계는 아직 불안정한 국면이다. 노 대통령의 향후 국정운영 구상 및 특유의 승부사 기질에 비춰볼 때 제2, 제3의 승부카드가 던져질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11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조건부 탈당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가능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야당들이 개헌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해온다면 고려한 수 있다”며 야당의 개헌 협조를 전제로 한 탈당 가능성을 시사했다.
노 대통령은 또 일단 일부 언론과 정치권이 또 다른 승부카드로 예상한 중대선거구제 및 조기 하야론과 관련해서는 분명한 선을 그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불신임으로 간주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개헌 발의권을 가진 대통령으로서 개헌을 제안하는 것은 역사적 책무”라며 “대통령의 책무로 이 권한을 행사한 것이기 때문에 신임을 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해 임기단축 가능성을 부인했다.
남은 임기 내에 개헌 문제 말고도 선거구제 개편 등의 다른 정치적 이슈를 제시할 의사가 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과 관련해서는 “개헌은 어느 당에도 불리하지 않지만 중대선거구제를 하거나 비례대표를 늘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한나라당이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결정적 이해관계가 걸려있기 때문에 억지로 하자고 설득할 수 없다”며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일부 정치권과 언론에서 예단했던 숨겨진 승부 카드에 대해서는 철저히 차단하는 동시에 개헌 제안의 진정성을 부각시키며 자칫 활활 타오르기도 전에 꺼져버릴 수 있는 개헌 불씨 살리기에 주력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회견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꺼내든 개헌 카드와 조건부 탈당 발언 이면에는 진정 정치적 꼼수 내지는 정략적 노림수가 전혀 내포돼 있지 않은 것일까. 아직 속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대다수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의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정치권 일각에서는 개헌과 탈당 시사 발언 이면에는 재집권 플랜 등 거대한 정치적 음모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어떤 경우든 개헌안 발의는 할 것이라는 노 대통령의 말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헌안이 부결돼도 나는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말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아무리 반대해도 국회에서 부결되기 전까지는 개헌안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의 제2, 제3의 카드가 나올 가능성이 농후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일단 정치권은 개헌은 사실상 물 건너 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개헌 발의는 있을 것이며 이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기까지, 그리고 부결된 이후 노 대통령의 판 뒤집기 카드가 하나하나 나올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크고 파괴력이 큰 것은 ‘임기 단축’ 또는 ‘조기 하야’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 중진인 K 의원은 11일 오후 기자와 만나 “현 정권 핵심부를 중심으로 한 재집권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는 것 같다”며 “개헌이니 탈당이니 하는 카드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고 정국을 뒤흔들 제2, 제3의 충격 카드가 준비돼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충격 카드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K 의원은 “노 대통령이 비록 임기를 단축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개헌 문제가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노 대통령은 언제든 하야 카드를 다시 꺼내들 가능성이 농후하고 이 경우 조기 대선정국에 직면한 한나라당은 극심한 내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K 의원은 또 “노 대통령이 승부수를 꺼내든 가장 큰 이유는 자신과 여권 차기주자들의 지지율에 비춰볼 때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이 작용한 것”이라며 “개헌 정국을 틈타 자신의 후계자를 확실한 제3후보로 띄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잠복된 조기 하야 카드야말로 정치판을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기존 대선구도를 확실하게 재편하는 메가톤급 뇌관이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이 받을 충격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본선보다 치열한 당내 경선을 예고하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 측이 조기 대선정국이 도래할 경우 일정상 어느 한쪽은 대권을 양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조기대선이 현실화되고 두 사람 모두 출마를 강행할 경우 한나라당 또한 분열이라는 끔찍한 상황을 맞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조기 하야 카드는 일단 개헌안이 국회를 거쳐 국민투표에 부쳐질 경우 유효한 카드지만 개헌안이 국회 논의 중 또는 표결에 부쳐져 재적 3분의 2 찬성을 얻지 못해 부결될 경우에도 내놓을 수 있는 카드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이 복심의 인물을 개헌과 맞물려 전면에 내세우는 시나리오를 그리는 사람도 많다. 즉 노 대통령이 개헌 카드로 정국의 물꼬를 틀어 개헌 세력과 반개헌 세력으로 구도를 만든 후 의중에 두고 있는 제3후보를 전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데뷔시켜 개헌정국을 주도하게 해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제고시킨다는 것이다. 이 후보가 부상하면 적절한 시점을 택해 ‘개헌 부결’ 등을 명분으로 전격 ‘하야’ 카드를 꺼내들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경선 다툼이 최고조에 달한 한나라당은 극심한 내홍에 빠져들면서 대권주자들이 독자출마함으로써 개헌을 기치로 나선 여권의 후보가 복수 주자를 상대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란 게 이들이 추측하는 재집권 플랜의 골자다.
실제로 맹형규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2005년 8월 이러한 플랜과 엇비슷한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했다가 부결될 경우 대통령직을 중도사퇴하고 대선 조기 실시 수순을 밟아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당시 맹 의원이 주장한 시나리오의 핵심이다.
한편 노 대통령이 11일 밝힌 조건부 탈당 카드는 야당도 야당이지만 핵분열 위기에 처한 열린우리당을 겨냥한 측면이 강한 것으로 정계는 보고 있다. 이는 개헌안의 통과 여부와는 관계없이 유효한 수순이다. 현재 노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있는 정당은 민주당이 유일하고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탈당 문제에 대해선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이 야당의 개헌 협조를 전제로 탈당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것은 야당보다는 여당 내 신당파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실제로 정계개편 문제를 둘러싼 열린우리당 내 계파간 갈등이 증폭되면서 당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탈당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권 분열이 현실화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노 대통령의 탈당 요구가 거세질 것에 대비해 조건부 탈당이라는 선제공격을 통해 신당파의 탈당 요구 움직임을 무색하게 만드는 동시에 여당 주자들의 차별화 전략을 사전에 차단시키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또 야당이 개헌 논의에 동참해 탈당을 하더라도 또다른 승부카드로 예상되고 있는 선거관리형 중립내각 구성도 진정성을 담보로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이란 포석이 내포돼 있을 것이란 분석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야당이 끝까지 개헌을 반대해 탈당 사유가 발생하지 않을 경우에도 노 대통령은 적잖은 정치적 실리를 챙길 수 있다. 즉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열린우리당에 잔류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는 반면 신당파 입장에서는 노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구할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노 대통령이 당적을 담보로 열린우리당 사수를 견지할 경우 신당파는 밖으로 나가 신당창당을 추진할 수밖에 없고 노 대통령은 친노그룹을 중심으로 끝까지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사수함으로써 개혁세력을 다시 결집시키는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란 시각도 적지 않다.
개헌이 어떤 식으로든 무산될 경우에도 노 대통령에게는 마지막 카드가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정계의 일치된 시각이다. 최후의 승부수로 남북정상회담 카드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 그것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대북 지원 재개 가능성을 시사하는가 하면 북한을 의식한 듯한 일련의 대북정책 기조는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정치권의 시선을 개헌 정국으로 집중시키면서 대북 창구를 총동원해 올 하반기나 대선 직전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킬 경우 평화세력과 반 평화세력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정국주도권은 물론 대선정국에서 열린우리당이 극적인 반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란 그럴듯한 시나리오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노 대통령이 꺼낸 개헌과 조건부 탈당 카드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노림수와 또다른 제2, 제3의 승부카드가 무엇일지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헌 카드로 정쟁의 중심에 선 노 대통령이 개헌안 처리 과정 곳곳에서 친노그룹이 자생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 제공과 나아가 정권재창출을 위해 숨겨진 히든카드를 앞으로도 하나 둘 꺼내들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런 히든카드가 하나만 적중해도 손해는 아니란 것이 노 대통령의 계산인 듯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