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결과가 나온 후 팬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아니, 싸늘했다. 그날 저녁 각 인터넷바둑게시판은 박정환이 타이틀을 따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성토하는 팬들의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국내에서만 이기면 뭘 하나. 밖에 나가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인데…’라거나 ‘박정환은 새가슴’ 이라는 등 비난 일색이었다.
박정환(왼쪽)이 최근 커제에게 3연승을 거두는 등 세계랭킹 1위 탈환에 목전에 두고 있다. 현재 응씨배, 백령배, 몽백합배에서 순항 중이다. 6월 1일 커제와의 LG배 대국장면.
한국 바둑의 투톱 중 일인인 이세돌 9단에 비해 성적이 나쁘지 않은데도 그런 반응이 나온 것은 박정환의 세계대회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지는 한국바둑의 법통은 박정환에게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박정환은 선배들처럼 세계무대에서 강미를 보여주지 못했다.
18세 때인 2011년 후지쓰배 정상에 오른 것은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번번이 세계정상 길목에서 중국기사들에게 발목을 잡혔고, 어렵게 올라간 2013년 제7회 응씨배 결승에서는 판팅위에게 1-3으로 패하고 만다. ‘세계대회 울렁증’, ‘새가슴’이란 말이 나온 것도 이때부터였다.
작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4년 만에 세계대회 정상에 올랐지만 하필이면 결승 상대가 김지석 이어서 팬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하지만 최근 박정환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끈다. 박정환은 지난 4월 22일 열린 응씨배 16강에서 중국의 신예 황윈쑹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중국 기사들에게만 무려 13연승을 기록 중이다. 이 중에는 세계랭킹 1위라는 커제에게 거둔 3승이 포함돼 있고 탕웨이싱, 스웨도 박정환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특히 커제는 2015년 세계대회 3관왕(삼성화재배, 몽백합배, 백령배)이지만 올해 박정환을 상대로는 판 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응씨배 16강, LG배 8강에서 패했으며 중국 갑조리그 주장전에서도 패했다. 우리 바둑계는 작년에 이어 커제의 세계대회 2차 공습을 걱정했는데 박정환이 선두에 서서 커제를 막아낸 셈이 됐다.
연초 인터뷰에서 박정환은 “국내기전보다 세계대회에서 더 긴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팬들의 바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잘하려고 하는데 그게 오히려 부담이 됐던 것 같다. 극복해야 할 과제다”라고 말한 후 “현 시점에서는 커제를 세계 최강이라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내게도 부담스런 상대지만, 만나면 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입으로 라이벌을 추켜세운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닐까. 박정환은 묘하게도 이 인터뷰 후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다.
응씨배에서는 황윈쑹(국내팬들에겐 낯선 이름이겠지만 김성룡 9단은 커제급으로 평가하는 신예다), 커제, 이세돌을 연파하고 결승에 올랐고, LG배에서는 장웨이제, 커제를 물리치고 8강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열린 중국 주최의 세계대회인 백령배에서도 기세는 꺾이지 않아 리밍, 구리, 탕웨이싱을 연달아 물리치며 8강에 진출했다. 최근의 성적만 놓고 보면 작년 커제가 부럽지 않은 기세다.
특히 응씨배 결승전을 앞두고 전초전 격으로 열린 탕웨이싱과의 백령배 32강에서 압도적 내용으로 승리를 거둬 응씨배 우승 전망에 청신호를 밝혔다.
국가대표팀 코치 목진석 9단은 “박정환 9단이 최근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요즘은 시합 스케줄이 많아 국가대표 연구실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체 리그전은 열심히 참가하려고 노력한다. 최근의 상승세 이유는 글쎄…. 일단 자신감이 더 붙었고 최근 성적을 내고 있는 기전들이 속기가 아닌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인데 박정환 9단 기질상 속기보다 이쪽이 더 맞는 것 같다”고 연승 이유를 분석했다.
또 최명훈 코치는 “일단 본인이 몸 관리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응씨배에도 동행했었는데 한국 선수들 중 아침을 챙겨먹은 사람은 박정환이 유일했다. 기사들이 대개 젊기 때문에 평소 생활이 규칙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박정환은 예외다. 체력 단련도 정기적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운동할 시간이 없으면 산책이라도 하더라. 최근 인터넷 대국도 줄였다고 하는데 그 역시 좋은 쪽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사실 박정환 급 정도 되는 기사의 인터넷 대국은 실전감각 유지에 도움되는 측면도 있겠지만 착수가 경솔해질 수 있고 솔직히 상대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잘한 결정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박정환 9단은 오는 8월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응씨배 결승5번기를 시작으로 8월 25일에는 백령배 8강전, 9월 1일엔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TV바둑아시아선수권전, 9월 5일부터는 삼성화재배 본선에 잇달아 출전하게 된다. 과연 박정환 9단이 숨 가쁜 일정을 뚫고 팬들의 돌아선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된다.
유경춘 객원기자
“주장전 7연승이요!” 용병 박정환, 중국 갑조리그 선두 견인 중국 갑조리그는 총 12개 팀이 매 라운드 6경기를 벌인다. 한 경기당 주장전을 포함해 4국이 진행된다. 이 중 3국은 제한시간 각자 2시간 40분에 초읽기 1분 5회가 주어지는 장고대국이며, 나머지 1국은 30초에 1분 초읽기 10회로 진행하는 속기대국으로 치러진다. 각 라운드에서 4-0 또는 3-1로 이긴 팀이 승점 3점을 받게 되며 2-2 동률의 경우 ‘주장전’ 승자팀 2점, 패자팀 1점으로 점수를 나눠 가진다. 최종 순위는 포스트시즌 없이 22라운드까지 누적된 팀 승점으로 결정된다. 한편 올 시즌 중국 갑조리그에서 용병으로 뛰고 있는 한국기사는 6명(박정환, 김지석, 강동윤, 최철한, 이동훈, 신진서)이며 11라운드까지 중국기사를 상대로 33승 18패를 기록하고 있다. [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