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위부터 순서대로 서울시내 한 병원의 모습. 영화 <식코>에 등장하는 의료보험 미 가입시 손가락 봉합 가격표와 <식코>의 포스터. | ||
이 영화는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찢어진 상처를 자신이 직접 꿰매는 아담, 일하다 손가락이 잘리는 순간에 자신의 손가락보다 병원비를 먼저 걱정하는 릭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릭은 결국 수술비 때문에 치료비가 싼 네 번째 손가락만 봉합하고, 가운데 손가락은 결국 공원에 묻는다.
우리나라에서도 건강보험 민영화 논란이 계속되면서 <식코>의 내용이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흔히 ‘건강보험 민영화’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보다는 ‘보건의료서비스의 산업화’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즉 ‘의료서비스’에 대하여 산업화’한다는 뜻이다.
의료서비스 산업화의 골자는 크게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의 완화 혹은 폐지와 함께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영리법인 병원 도입 등의 세 가지다.
정부가 의료서비스 산업화를 추진하려는 이유는 의료서비스 분야가 교육, 법률 등과 함께 고부가가치 산업의 하나라는 인식 때문이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아닌 경제부처가 보건의료서비스의 산업화를 더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의료서비스가 산업화되면 지금과는 어떻게 달라질까. 별다른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
시민단체들 사이에서는 “의료서비스를 산업화하게 되면 우선 진료나 처치·수술 등 의료서비스의 가격이 인상돼 의료이용의 불평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민간보험에 가입해 고가의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지만 반대로 안 그래도 병원의 문턱이 높은 저소득층은 의료기관 이용이 더 어려워져 기본적인 건강마저 돌보기 힘든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병원의 입장에서는 전보다 더 상업화된 의료서비스 개발에 치중하게 된다. 민간보험은 역할이 커지고 시장을 더 넓히려고 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국민건강보험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건강보험이 담당하는 의료서비스도 자연히 위축돼 저소득층에 불리하게 작용, 건강 불평등이 더 심해지고 이 불평등이 다음 세대까지 대물림되는 악순환을 생각해봐야 한다.
실제로 개인의 사회경제적인 수준의 차이가 건강 수준의 차이를 유발한다는 보고는 많이 나와 있다. 우리나라 국민의 소득을 다섯 등급으로 나눌 때 소득이 가장 낮은 20%의 사망률은 가장 높은 20%의 2.3배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김창보 소장은 “의료서비스가 산업화되면 국가·사회적 차원에서도 전체적인 의료비가 증가하고, 치료와 상관없는 고가서비스가 개발되는 등 보건의료 체계의 비효율성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지정제 완화 - 의료이용 불평등 우려돼 방침 철회
병의원이나 약국 등에서 건강보험 적용을 거절할 수 없도록 국민건강보험법에서 정해놓은 것이 당연지정제. 이 제도 때문에 우리가 아플 때 어떤 병원을 가더라도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는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당연지정제가 완화되거나 폐지되면 의료비 부담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만약 당연지정제가 폐지될 경우 경제적인 여유가 있으면 여러 개의 민간보험을 가입해서, 의료비 혜택을 볼 수 있는 층과는 달리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려면 비싼 의료비로 고통받게 된다. 또 자신이 원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힘들어진다. 자신이 치료를 받고 싶은 병원에서 민간보험이 아닌 건강보험 환자의 치료를 거부하면 내키지는 않더라도 건강보험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 중에서만 치료를 받아야 한다.
원래 정부는 의료수요자와 공급자의 선택권을 강화하고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당연지정제를 완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당연지정제가 완화되면 의료이용 불평등, 의료비 상승 등의 부작용에 대한 여론이 크게 일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10만 명 서명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 보건복지가족부가 최근 이 방침을 철회,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지 않고, 현행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민간보험 활성화 - 15%가 혜택 못받는 미국이 ‘타산지석’
전 세계 어느 나라나 민간보험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민건강보험이 전체 의료비의 약 80% 정도를 담당하고, 나머지만 민간보험이 맡고 있다. 이보다 국민의 부담을 아예 없애 영국처럼 사실상 무상 의료 체계인 나라도 있다. 캐나다나 쿠바 등도 영국과 유사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이 전체 의료비의 56% 정도를 부담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보험을 활성화시키면 국민들의 부담이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창보 소장의 설명이다.
병원의 입장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민간보험의 활성화를 지지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의 의견도 나오고 있다. 사람들이 동네 의원을 이용하기 위해 민간보험에 가입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민간보험이 더욱 활성화되면 대형병원 중심으로 환자가 몰릴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른바 병원의 양극화가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영화 <식코>를 통해 본 미국의 의료서비스는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 미국은 우리나라 같은 국민의료보험 제도가 없고 민간보험이 중심인 나라로, 전 국민의 약 15% 정도가 보험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민간보험에 가입된 사람들은 원하는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보험이 없는 나머지 15%의 사람들은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담을 떠안게 된다. <식코>에서는 미국이 전 세계 의료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의료비를 쓰지만 국민의 15%인 5000만 명은 의료보험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매년 1만 8000여 명이 보험이 없어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음을 고발한다.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정부가 부담하는 특별의료비부담 제도와 함께 민간보험회사가 운영하는 건강보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우리 정부가 네덜란드와 비슷한 방식을 검토한 결과 우리나라에 적용하기 어려운 사례로 결론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리법인 병원 도입 - 이윤만 추구하는 진료 증가 우려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병원은 비영리법인이다. 비영리법인 형태의 병원이라고 해서 수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비영리법인 병원에서는 발생한 수입을 병원에 다시 재투자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수입을 모두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병원의 시설이나 장비, 인력에 재투자해야만 한다.
하지만 병원의 영리법인이 허용되면 투자자들의 자본이 병원의 시설, 장비, 인력 등에 투자되고 발생한 수입을 투자자들이 가져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투자자들은 보다 많은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애쓰게 되고, 이에 따라 병원에서는 이윤을 위한 진료, 상업화된 진료가 늘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문제는 영리법인 병원이 국민의 건강보다는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동안 꼭 받아야 하는 치료를 비싸게 받아야 하거나 아예 받지 못하는 국민들이 많아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고급병원을 이용할 수도 민간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는 서민층이 의료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병원의 영리법인 허용은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부터 검토되었던 것으로 이병박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과제 중의 하나로 보도된 바 있다.
보건복지가족부가 당연지정제 유지 방침을 밝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의료산업화 자체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나 병원의 영리법인 허용은 추진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점에 대해서는 각계각층에서 찬성하는 의견이 많다. 이에 대해 김창보 소장은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의료서비스를 민간보험 활성화나 병원의 영리법인 허용 등으로 산업화시키는 방법보다는 공공재원의 투자 같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처럼 의료서비스 산업화는 분명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경우처럼 문제점이 더 크게 제기되고 있는 만큼 ‘국민 건강’이라는 가치를 먼저 고려하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여론의 흐름으로 보인다.
송은숙 건강전문 프리랜서
도움말=시민건강증진연구소 김창보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