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씨는 서울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김포 대곶면 김포공원 묘원에 묻혀있다. 묘원에는 무덤 약 3000개가 자리잡고있다. 무덤으로 덮힌 야산 하나 넘으면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호수 옆에 떡갈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그녀 무덤 옆 비석엔 ‘안동권씨가족묘’라고 써있다. 가족묘인데 무덤 받침돌에는 권 씨 이름만 놓여있다.
지난 2014년 10월 10일 권 씨 유가족은 권 씨가 숨진 뒤 남긴 유서와 전자우편을 근거로 중기중앙회와 관련 혐의자 6명을 서울남부지검에 고발했다. 국정감사까지 불려가자 중기중앙회는 그해 11월 7일 ‘무기계약직 전환 암시 발언, 성희롱, 회사 명예 실추’를 이유로 권 씨의 상사였던 강 아무개 전무와 고 아무개 부서장을 각각 해임 및 면직 처분했다. 고 부서장은 면직된 지 46일만에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 해고 구제 신청안을 접수했다. 검경의 조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던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그는 노동위 문을 두드렸다. 고 부서장은 “나도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이다. 부당 해고가 확실하다고 판단해 검찰 처분 전에 구제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봄과 함께 모든 게 돌아왔다. 강 전무는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뒤 2015년 1월 중기중앙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내 스스로 그만뒀지만 그렇게 왔다. 죽은이가 남긴 유서 1장은 그해 2월 ‘증거불충분 무혐의’가 적힌 통지서 1장과 맞교환돼 돌아왔다. 고 부서장은 3월 3일 서울지방노동위에서 부당 해고 구제 승인서를 받아왔다.
서울지방노동위는 “잘못은 다른 사람들도 같이 했는데 권 씨의 상사란 이유로 많이 책임진 부분이 없지 않다. 행위에 비해 양형이 과했다”며 부서장의 복직 승인 이유를 밝혔다. 중기중앙회는 고 부서장이 복직하자 징계 조로 지역본부에 무보직 재배치했다. 유배 지역은 여의도 본사에서 25㎞ 떨어진 수원 영통구 경기지역본부로 드러났다. 지방노동위에서 부당한 판결이 나오면 중앙노동위에 재소가 가능하지만 중기중앙회는 그를 품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제주도, 강원도로 보내면 징계고 수원은 징계가 아니냐? 이는 징계나 다름없는 인사 조치다. 재소 가능 여부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기사 자료는 처음 다른 일간지 동기가 쥐어줬다. 동기는 “우리 회사가 해당 사건은 무혐의인데다가 노동위도 복직 승인했으니 문제될 게 별로 없다”는 말과 함께 ‘킬’됐다며 기초 자료를 넘겼다. 추가 취재해 기사를 가져갔더니 예전에 모시던 한 선배는 “이 정도 가지고 성희롱이라 말할 수 있냐? 이거 일상다반사잖아”라며 기사화 어렵다고 말했다. 한 통신사 기자는 “중기중앙회랑 친해서 이걸 기사화할 수가 없네”라고 답했다. 권 씨가 남긴 전자우편에는 최근 화제인 제약회사 CEO의 ‘빠XX(성교를 속되게 이르는 말)’ 발언, 기부가 취미인 한 대표의 스폰서 제안 등이 A4용지 7장에 적혀있다.
며칠 전 한 거대기업 차장의 하청 큐레이터 성희롱 사건을 취재하다 문득 권 씨가 생각났다. 달력을 열어보니 기일이 근처였다. ‘김포공원 묘원’이란 정보 하나로 김포를 찾았다. 무덤 3000여 개를 보자마자 “공원 가운데에서 묵념만 하고 가도 충분한 애도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뭔가 여기 같다”는 생각을 한 그 곳에 바로 권 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었다.
기자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누구든 오늘 권 씨 묘를 찾은 과정을 우연이라 말할 것이다. 난 오늘 기자가 아니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