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요신문] 박하늘 기자 = 청자, 화랑, 백양, 진달래, 신탄진, 라일락, 장미, 도라지, 한라산, 거북선, 태양, 솔. 얼핏 보면 개연성 없는 낱말들 이지만 의외로 쉽게 하나의 명사를 연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모두 우리나라 담배 이름로 국민과 애환을 같이 했던 가장 친근한 단어들이기도 했다.
생소한 독자들도 있지만 한때는 본 뜻보다 담배 이름으로 훨씬 더 익숙했다.
9일 한글날 찾은 한 편의점의 담배 진열대. 단 하나의 우리 글로 된 담배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수입담배는 물론 우리나라 담배도 한글로 된 이름은 하나도 없다. 외국인이 우리 담배를 처음 접할 땐 어느나라 담배인지 모를만하다.
90년대 까지만해도 대부분의 담배는 한글이었다. 2000년 대에 들어서기 전에는 위에 거론된 담배들 처럼 한글 이름 일색이었다.
한국 기술로 만들어진 최초의 담배 승리부터 국군창설 기념으로 만들어진 화랑, 아시아 최대 담배공장이 세워진 신탄진의 이름을 딴 ‘신탄진’, 그 외 진달래, 라일락, 장미, 솔, 한라산, 거북선 등 이다.
1988년 담배시장의 문호가 개방된 후 외국산 담배가 밀려들어왔지만 우리나라 담배는 한글이름으로 그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글이름의 담배들은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90년대 초반 글로리(GLORY), 컴팩트(COMPACT) 등 한글이름의 담배들 사이에서 외국이름의 담배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서민을 위한 담배라는 디스(THIS)를 시작으로 한글 담배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이후 오마샤리프(OMAR SHARIF), 심플(SIMPLE), 에쎄(ESSE), 겟투(GET TO), 레종(RAISON), 시즌, 더원 보헴 등이 잇따라 외국이름을 뒤집어 쓰고 나오며 2000년대 이후에는 어느 샌가 외국어 이름이 더욱 익숙해졌다.
그 와중에 1990년대 후반 ‘시나브로’라는 국산 담배가 신선한 충격을 전했다. 외국이름이 익숙해지던 시기, ‘시나브로’ 또한 외국어겠지라고 넘기려던 순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을 지닌 순 우리말임을 알게된 뒤 가진 충격은 컸다. 그 이후 시나브로라는 낱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쉽게 흘러나오게 한 것도 이와는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반면 담배를 소주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담배가 외국어에 잠식됐는지 더 극명해진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소주의 이름을 나열해 보면 참이슬, 처음처럼, 시원소주, 참소주, 산소주, 잎새주, 맑을린, 보배, 한라산, 맑은바람 등 대부분이 한글이다.
한글 이름이어선지 한국 술이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소주가 우리나라 술 임을 감안한다면 한글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담배는 이미 조선 후기부터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었으며 90년대 이전엔 우리말로 된 이름 일색이었다는 사실은 담배와 한글이 어색하지 않다.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을 쓴 이성민 철학박사는 한 인터넷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서양어로 지은 이름은 담배이름은 전부 관념어”라며 “우리가 보편적 사유를 할 때는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라고 주장했다.
외국어와 외래어가 잠식해버린 분야가 꼭 담배에 국한되진 않다. 이미 우리나라 제품 중 한글로 된 이름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발암물질 등 유해 물질이 많은 것으로 규명돼 금연구역의 확대 등으로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담배가 흡연자의 육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의 정신을 피폐화시키고 있다.
‘코리아 페스타’니 ‘글로벌 마인드’니 하며 한글 외면을 부추기는 정부에 비해 건강에 해로운 담배 이름에 소중한 우리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죄스러워 뜻 모르는 외국어로 표기하는 KT&G가 한글날 표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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