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장본인으로 찍힌 최순실 씨가 전격 귀국한 후 국면이 전환되고 있다. 언론이 발굴해 생산해 내는 의혹은 줄어드는 반면, 국민은 검찰의 손에 넘어간 최 씨의 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를 둘러싸고 정가에서는 거대한 시나리오가 그려졌고, 수많은 경우의 수에 대비한 플랜들이 가동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상과는 한 박자씩 엇갈리는 사건이 생기고 있어서다. 도대체 이 거대한 음모의 드라마는 어떻게 종지부를 찍게 될까.
검찰에 출석한 최순실 씨. 사진공동취재단
최 씨는 10월 30일 오전 영국을 출발해 귀국했다. 지난 7월 미르·K스포츠재단과 관련한 의혹이 불거진 지 거의 넉 달 만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90초 대국민사과 기자회견(25일)이 있은 지 닷새 만이었다. 그 사이 <세계일보>는 26일(현지 시간) 최 씨를 독일에서(세계일보는 독일 한 호텔에서 만났다고 썼지만 네티즌은 덴마크임을 밝혔다) 단독 인터뷰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 사과와 최 씨 인터뷰 내용은 흡사했다. 정권 초기 이메일을 통해 도움을 주고 받았지만 그 이후에는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둘이 입을 맞췄다 내지는, 박 대통령이 대국민사과 내용으로 최 씨에게 인터뷰의 가이드라인을 줬다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던 대목이었다.
게다가 검찰의 수사 직전 태국으로 출국했던 최 씨의 측근 고영태 씨가 그달 27일 검찰에 자진 출두한다. ‘문화융성의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 씨는 곧 귀국해 검찰 조사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조인근 전 청와대 연설기록관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연설문은 수정되지 않았다”는 회견을 한다. 검찰은 그 다음날 29일 청와대 압수수색에 나서지만 청와대의 빗장으로 실패하고 다음날 2차 수색에 나서지만 텅 빈 박스만 들고 나온다. 한 비박계 의원은 “뭔가 아귀가 딱딱 떨어지는 것 같지 않은가”라고 했다.
정치권 사정을 수집하는 한 기관의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최 씨에게는 귀국 시그널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랬다.
“국민이 언론의 의혹 제기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시점이 ‘태블릿PC’의 등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관련 뉴스가 보도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의혹은 의혹일 뿐’이라고 대응할 수 있는 임계치가 넘어섰고 ‘의혹은 곧 사실’이 되는 국면으로 전환하자 박 대통령이 결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최 씨의 귀국으로 국민의 시선을 모두 검찰로 향한 것 아니냐.”
검찰은 최 씨의 귀국을 인지했음에도 그를 즉각 체포하지 않고 하루의 여유를 줬다. 그 시간 최 씨는 지인들과 호텔을 전전했고 버젓이 은행으로 가 예금을 인출하기도 했다. 도피생활이 가능하고도 넘칠 정도로 자산가로 꼽히는 최 씨의 전격 귀국으로 첫째 뉴스생산자가 바뀌게 된 셈이다.
# 국무총리로 김병준 낙점, 나머지는 쇼?
집권여당인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야3당은 거국내각 구성이라는 큰 틀에서의 합의에 도장을 찍기 직전이었다. 권위가 무너진 박 대통령은 사실상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고 실권은 여야가 합의해 추대하는 국무총리가 쥐고 국정을 운영하자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지난 2일 총리로 지명하게 된다. 새누리당은 김 교수가 ‘노무현의 남자’라는 점에서 거국내각의 성격이 강하다고 했지만, 문재인 전 대표와 멀어진 김 교수를 바라보는 민주당의 시선은 차가웠고,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하려던 국민의당은 체면을 구겼다. 문제는 김 교수와 박 대통령의 독대 시점이다.
박 대통령은 주말이었던 지난달 29일 김수한 박관용 전 국회의장 등 새누리당 상임고문과 식사를 함께 하며 향후 정국 운영 방안에 대한 고견을 청취했다. 이튿날인 30일에는 고건 전 국무총리 등 시민사회원로와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김 교수가 박 대통령을 만난 것은 29일이고, 이 시점에 국무총리로 내정을 받았다. 이에 정가에서는 “김 총리를 내정하고서 원로들과 만나 고견을 구한 것처럼 했다”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김병준 지명에 내막이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팩트’만 나열해보자. 김 교수 고향은 경북 고령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었던 영남대 출신이다. 박 대통령은 고령 박 씨다. 최 씨의 법률대리인을 맡은 이경재 변호사의 고향은 경북 고령이다. 우병우 청와대 전 민정수석의 장인인 고 이상달 기흥컨트리클럽 회장의 고향은 경북 고령이다. 김 교수는 이 전 회장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한 적도 있다. 우 전 수석의 후임인 최재경 민정수석의 처가도 경북 고령 사람들로 알려졌다.
새누리당 내에서는 ‘경제민주화’ 전도사인 김종인 민주당 의원이 거국내각의 중심에서 총리직에 적합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손학규 민주당 전 상임고문은 국무총리 제안이 온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대통령과 독대해서 김 교수도 추천했다”고 밝혔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다.
새누리당 소속이지만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한 고위 관계자는 “김 총리 지명으로 결국 혼란 수습의 책임을 의회로 돌릴 수 있게 됐다”며 “야당이 야당 출신을 비토할 경우 박 대통령에게만 집중되는 눈이 정치권 전체에 대한 실망감으로 희석되는 효과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 순연되는 새누리당 의원총회는 친박 지도부 지키기?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은 지난달 말 주말을 기해 단체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수직적 청·당 관계를 가져가다보니 이런 국정농단 사건을 견제하기도, 이후 수습하지도 못 하는 것 아니냐며 ‘지도부 총사퇴’ 기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모임을 만들었고, 비박계 잠룡들은 긴급 회동에도 나섰다. 그리고 지도부 총사퇴를 논의할 긴급 의원총회 개최를 정 원내대표에게 요구했다. 그래서 지난 2일 의원총회 개최 예정이었지만 정 원내대표는 건강문제를 들어 그 주 내 의총 개최를 약속한다. 그렇게 금요일인 4일 오후 2시로 잠정적으로 잡혔다가 다시 오후 4시로 바뀐다.
문제는 박 대통령의 대국민 두 번째 담화가 이날 오전 10시 30분으로 잡히면서다. 석연찮은 이유로 순연된 의총 개최를 몇 시간 앞두고 박 대통령이 대국민사과에 나서고 머리를 조아렸다. 특검을 수용했고 검찰 수사도 받겠다고 발표했다. 의총에서 논의될 안건 중 두 가지, 즉 특검 수용과 대통령 조사가 빠지게 됐다. 한 재선 의원은 “금요일 오후 4시에 한다는 것은 사실상 의총에 참석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아니냐”고 했다.
또 의총이 미뤄지는 동안 당 지도부가 의총소집요구서에 서명한 의원들에게 압박성 전화를 돌린 것으로도 알려졌다. 의총을 최대한 늦추고, 그 사이 박 대통령의 담화를 끌어내는 모종의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고, 이를 두고 A 청와대 전 비서실장, 친박계 핵심인 B, C 의원 등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특히 B 의원은 고영태 씨가 검찰에 자진 출두한 그날 오후 친박계 회동을 소집한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