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지하철 시청역에 설치된 자선냄비 모금함엔 75년 전 구세군이 처음 자선냄비를 내건 이래 최대의 성금이 들어왔다. 이미 나온 보도와는 달리 선행의 주인공은 50대가 아닌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익명의 남성.
당시 모금 자원봉사를 했던 김태성씨(여·49)는 ‘그’가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겨울용 남색 작업복 점퍼와 남색바지 차림에 작업화를 신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또 돈을 자선냄비에 넣기 위해 허리를 굽혔을 때 허리위로 맨살이 드러날 정도로 남루한 차림이었다는 것.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고 말렸지만 그분은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손을 잡고 말리면서 다시 말했더니 제 말뜻을 못 알아들었다는 듯 ‘예?’ 하는 반문만 하시더라구요.”
구세군 모금함에 목돈이 들어왔다는 얘기는 매년 이맘때면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뉴스. 하지만 그 목돈의 규모는 대개 1백만원 정도였고 1천만원가량이 최고 기록이었다. 그런 까닭에 4천만원 가까이를 기부한 익명의 자선가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왜 이런 거액을 기부한 걸까. 당시 현장에 있었던 봉사자들은 ‘그’의 초라한 행색 때문에 ‘아마도 누구의 부탁을 받은 대리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갖고 있다.
그렇다고 구세군 본영이 나서 기부자를 찾을 수도 없는 상황. 기부자의 익명성을 지켜주는 구세군의 모금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년 전 구세군 대한본영은 한 고액 기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익명의 기부자를 추적(?), 신분을 밝혀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부자는 구세군 본부측의 감사를 받기는커녕 무척 불쾌해하면서 도리어 화를 냈었다는 것.
‘정체’가 밝혀진 탓인지 그 기부자는 매년 해왔던 고액 기부를 중단했다. 이후 구세군 내부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기부자의 신원정보를 추적·보도하지 말자는 내부규정까지 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3천8백여만원을 기부한 익명의 자선가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구세군 모금 기록을 갈아치운 이 ‘얼굴 없는 천사’는 자선냄비에 돈을 넣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역을 빠져나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사라졌다고 한다. 현장에 있던 봉사자들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미쳐 성함도 묻지 못했다며 지금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기자의 추적 결과 ‘그’가 넣은 두 장의 천만원대 고액권 수표는 각각 경기도 과천 우체국과 기업은행 과천 중앙지점에서 발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옷 차림새와 수표 발행지점으로 보아 그는 ‘과천지역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현장 노동자’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가 거액의 주인인 진짜 ‘얼굴 없는 천사’인지, 만약 그렇다면 그 돈에 얽힌 사연은 대체 무엇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