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방문 3일째 환송 오찬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
정치권 주변에선 오래전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승부카드는 정상회담이 될 것으로 관측해 왔다. 이는 과거 정권들이 선거 때만 되면 ‘총풍’ ‘북풍‘ 등을 조성해 핵심 이슈로 부상했듯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도 대북 카드를 연말 대선정국에서 활용하고자 할 것은 불문가지라는 분석에서 기인했다.
그동안 소문이나 ‘설’ 수준에 머물렀던 2007 남북정상회담이 지난 2~4일 평양에서 개최된 이후 정치권은 또다시 ‘신북풍’ 논란에 휩싸이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북측의 핵폐기 선언이나 종전선언과 같은 ‘빅쇼’는 연출되지 않았지만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평화공존을 토대로 한 합의문을 이끌어냄으로써 수세에 몰렸던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국 반전을 도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합의한 평화번영 선언문은 구체적 방안이 상당히 담겨 있지만 실천 방안이 결여된 희망사항의 나열이라는 회의적인 반응도 적지 않다. 선언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던 한나라당도 강경 대응으로 가닥을 잡은 모습이다. 5일 안상수 원내대표 주재의 주요당직자회의에서는 “경협으로 위장된 퍼주기 아니냐”, “한강하구 공동이용은 수도방위에 문제 생기는 것 아니냐” 등 항목별로 극도의 우려가 표출됐다. 심지어 “6·25남침도 사과해야 한다”, “강제수용소 폐쇄도 거론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명박 대선후보는 “평화정착 노력에 대해선 긍정평가한다”며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이지만 “비핵화가 강조되지 않은 것과 납북자 문제 등은 아쉬움을 갖는다”며 꼬리표를 달았다.
하지만 야당의 비판은 당초 예상했던 것으로 합의문 작성 주체인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세부 실천 방안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셈이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5일) 임시국무회의를 소집해 “다음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로드맵을 명료하게 만들어 이행하는데 혼선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흐지부지되는 일이 없도록 정리하는 게 필요할 것”이라고 주문한 것도 합의문 이행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상대로 ‘정상회담 정례화’를 이끌어 낸 것과 종전선언을 위한 3자 혹은 4자 정상회담의 중요성에 공감한 대목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2007남북정상선언’ 말미에 들어있는 정상회담 정례화 문구는 ‘남과 북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기로 했다’로 표기돼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남북관계가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례화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북측 입장을 받아들여 수시로 만나자는 용어로 바꿨지만 이는 사실상 정상회담의 정례화에 합의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북정상 간 회담 정례화 필요성을 역설해 온 노 대통령인 만큼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역량을 집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남북관계 발전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으며 정상간 만남이 정례화될 경우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논의와 합의의 수준도 그만큼 높아져 남북간에 예측가능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게 청와대 측의 설명이다.
특별수행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던 문희상 대통합민주신당 고문이 “몇 달 후 큰 일이 터질 게 있다”고 말한 것을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공동선언문 이행 과정에서 대북문제가 자연스럽게 핵심 이슈로 부상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특수를 발판으로 레임덕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승부수를 띄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노 대통령의 지지도가 껑충 뛰어 오른 것도 큰 힘이 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신정아·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비리의혹과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 불법정치자금 수수 의혹 사건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한때 20%대 아래까지 떨어졌던 지지율을 정상회담 한방으로 30%대로 끌어 올렸다. CBS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주간 여론조사 결과,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정상회담 후 30.7%로 전주 대비 9.2%p 상승했다. SBS와 한국리서치 조사에서는 43.4%로 지난달 27일에서 29일 사이에 실시한 조사에서보다 13.2%p나 올랐다.
그러나 역풍을 우려하는 소리도 없지 않다. 임기 말의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 결과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나가려고 할 경우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임기 말 대통령이 지난 5년간의 일을 마무리하기는커녕 다음 정권에 부담을 줄 일을 벌이는 데 대한 반발도 예상된다. 한나라당의 안상수 원내대표가 정상선언에 대한 비준동의와 관련 “헌법 정신, 비용, 재원 조달 방법 등의 측면에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면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며 “합의문 전체에 대해 일괄 비준절차를 밟는 것은 문제인 것 같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상황을 대변한 것이다. 특히 국회 비준이 늦춰지거나 일부 거부되는 경우 노 대통령은 말 그대로 식물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상회담 특수가 과거 정권과 마찬가지로 임기 말 불거진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레임덕에 직면한 노 대통령을 깊은 수렁에서 탈출시키는 동시에 정국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가 될 가능성은 크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대선정국은 물론 자신이 공언했던 대로 임기 마지막 날까지 할 말을 하면서 원칙과 소신에 따라 국정운영을 펼쳐나갈 것으로 관측된다.
청와대는 지난달 7일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등을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소하면서 “참여정부는 임기 마지막 날까지 원칙을 지키면서 ‘초유의 일’들을 하나씩 둘씩 묵묵히 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권력형 비리 사건 등으로 한동안 수세에 몰려 소극적 행보를 보여왔던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 특수를 등에 업고 본격화되고 있는 대선정국에서 어떤 승부수를 띄울지 귀추가 주목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