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19일 정동영 후보가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다. 국회사진기자단 | ||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는 지난 10월 19일 DJ를 만나기 위해 동교동을 방문했다.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은 적잖은 관심을 불러 모았다. 범여권 통합을 강하게 촉구해 오던 DJ이기에 정동영 후보에게 어떤 ‘훈수’를 할지가 주목을 끌었던 것. 정 후보는 DJ에게 “제가 부족하고 혼자해선 안 되고 저를 비우고 낮추고 힘을 모아서 승리하도록 하겠다”며 당의 화합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임을 밝히며 지지를 부탁했다.
정 후보의 입장에서는 ‘호남 민심’을 쥐고 있는 DJ의 지원을 얻어 호남에서의 확고한 지지기반을 마련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경선 이전 각 대선주자들이 잇달아 DJ를 예방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경선 전까지만 해도 DJ는 한번도 ‘복심’을 보여주지 않은 채 대선주자들의 애만 태웠던 게 사실이다. 당시로서는 범여권 후보 단일화를 강조하고 있던 DJ의 입장에서는 특정 후보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의사를 밝힐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이날 정 후보의 방문을 받은 DJ의 발언은 여전히 다소 애매한 듯했다. DJ는 “경선 마지막 날 손학규, 이해찬, 정동영 후보의 연설 중계를 다 보았는데 정 후보의 연설도 좋고 다른 분들도 좋았다. 몇 달 전까지 사분오열돼 있던 현실을 생각하면 두 후보의 승복이야말로 50년 민주세력의 저력을 보여준 상징적인 자세였다”고 평가했다. 누구를 칭찬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발언이었다. DJ는 또 “국민이 바라는 바를 받들어서 국민의 뜻대로 대연합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국민이 잘 이해 못하시면 설득하고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소신이 있다면 운명을 걸라”고 원칙론 수준에서 충고했다. 경선에 승리하고 지지율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정 후보로서는 답답했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범여권 일각에서는 DJ가 아직까지도 마음을 분명히 정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대선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두 달도 채 남아있진 않지만 또 한편 이 시간은 대선이 임박해 있는 시점임을 생각하면 매우 긴 시간이기도 하다. DJ 역시 여전히 많은 변수가 남아있다고 판단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딱 부러지게 정 후보를 지원하기보다는 지원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날 마지막 한 달여 동안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정 후보 캠프에서 최근에 벌인 해프닝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DJ의 측근인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정 후보의 대선기획단 고문으로 위촉했다고 발표한 직후 곧바로 철회된 것. 정 후보가 DJ를 만나기 이틀 전인 지난 19일 정동영 후보 캠프 최재천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박지원 동교동 비서실장을 선대위 기획단 고문으로 위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지원 실장은 “아직 미복권 상태이고 정치활동 일선에 나설 입장이 아니다”라며 고사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박지원 실장은 2003년 대북송금 문제로 징역을 받았으며 현재 사면만 받은 상태다. 이로써 정 후보 캠프의 공식 발표는 곧바로 철회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고 만 것. 결국 최재천 대변인은 정 후보와 DJ의 만남 이후 다시 브리핑을 통해 “착오가 있었다”고 정정했다.
한편 정 후보의 동교동 방문 3일 후인 22일 이번에는 민주당 이인제 후보가 DJ를 찾았다. 민주당과의 불편한 관계가 지속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DJ는 이 후보에게 “수고 많이 했고 후보된 것 축하한다. 연설도 잘하더라”며 덕담을 했다. 이 후보가 “죽을 힘을 다해 했다”고 하자 “토론이나 연설은 이 후보가 원래 잘한다”고 칭찬했다는 후문이다. 이 자리에서 DJ는 “국민이 지지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앞으로 한 달쯤 되면 국민생각이 부각되지 않겠냐. 다 힘을 합쳐서 잘 되길 바란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공개된 문맥만 본다면 정 후보와 이 후보 사이에 별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면담 방식에 있어서는 정 후보와 그 ‘대우’를 달리했다는 것이 정계의 해석이다. 정 후보와는 한 시간여 만남 중 20여 분간 독대하며 비공개 면담을 나누었으나 50여 분간 만난 이인제 후보와는 따로 독대하지 않았다. DJ로서는 자신을 찾은 이들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쉽게 내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만들어 ‘컨트롤’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에 두는 정치 9단의 스타일을 다시 한번 선보인 셈이다.
DJ는 다른 정치인들과의 면담 자리에서도 좌중을 휘어잡는 관록의 대중강연 노하우를 드러내곤 한다. 적절한 농담과 적절한 칭찬을 섞어가며 ‘뼈 있는’ 멘트를 적재적소에 던진다는 평이다. 정 후보와의 만남에서도 DJ는 레이건과 먼데일의 대통령 선거 대결 당시의 일화를 꺼냈다. DJ는 ‘먼데일은 웅변가여서 화려한 정책을 매일 발표하니까 언론이 좋아서 대서특필했다. 레이건은 두어 가지만을 자꾸 되풀이하니까 나중에 기자들이 (공약이) 그거밖에 없냐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레이건이 대승을 했다.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니 투표장에 갈 때 레이건이 말한 것은 기억에 남는데 먼데일이 말한 것은 너무 많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더라”라는 예를 들었다. ‘국민이 무엇을 바라고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해서 한두 가지로 이거 아니냐고 어필해야 한다’는 요지의 선거 전략을 충고한 셈이다.
DJ는 정 후보를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주문해오던 ‘단일화’ ‘대통합’이라는 단어 대신 ‘대연합’이라는 새로운 표현을 내놓았다. DJ는 “국민이 바라는 바를 받들어서 국민 뜻대로 대연합을 준비해나가야 한다”며 “국민이 잘 이해를 못하면 설득을 하고, 국민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언급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이 말에 대해 “당과 당을 통합해 만들어 내는 후보단일화가 어렵다면 각 당이 대연합의 방식을 통해서라도 ‘한 명’의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주문으로 보여진다”고 해석했다.
더불어 독자세력을 추진하고 있는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을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DJ는 아직 문국현 전 사장과는 단독으로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얼마전 미국에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 그리고 문 전 사장을 나란히 언급해 주목을 끈 바 있다. 그 후 문 전 사장이 이를 고맙게 생각해 공식석상에서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도 각 후보의 지지율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DJ로서는 호남이라는 확실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단일화 후보가 누구든 자유로운 입장이기도 하다.
DJ의 ‘훈수정치’에 대해 정치권에서도 비판적인 시각도 많다.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 조순형 의원 또한 “전직 대통령의 정치개입은 훈수가 아닌 조언 정도에 그쳐야 한다”는 쓴소리를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그럼에도 대선주자들은 여전히 ‘DJ 눈치보기’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호남 민심이 아직도 범여권의 큰 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러 대선 주자들이 DJ의 정치적 경륜을 따라가기에는 아직도 한참 멀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