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뒤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원내 1당인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보수 분열의 틈새를 공략해 대반전을 꾀한다는 전략이지만 지지율이 3위로 밀려나는 등 또다른 위기국면에 직면하고 있다. 대세론을 확고히 구축하고 있는 이 후보와 정 후보를 가상한 범여권 단일후보 간 양자 대결구도 양상으로 전개되던 대권전쟁이 이 전 총재의 등장으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제로’의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전 총재가 대권 3수에 도전장을 내민 이면에는 분명 믿을 만한 승부 카드가 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출마 선언 이후 20%대 지지율로 단숨에 2위권에 안착하면서 대선정국을 대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회창 돌풍’의 파괴력과 숨겨진 승부수를 진단해 봤다.
“지금까지는 다 무효고 대선의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됐다”(정동영 후보)
“역사의 순리에 반하는 것이며 역사의 시간을 상당히 후퇴시켰다”(이명박 후보)
“정당의 근본을 부정하는 쿠데타”(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이 전 총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후 여야 유력 대선후보와 한나라당 대표가 던진 일성이다. 대선정국을 일순간에 ‘시계제로’ 상태로 빠뜨리고 있는 그의 막강한 영향력과 파괴력을 반증하는 발언들이기도 하다. ‘이회창 변수’가 현실화되면서 대선 판세가 요동을 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범여권과 각 대선후보 진영은 이 전 총재 출마에 따른 유불리를 따지며 대선 전략을 급수정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70대 노정객의 출사표가 여의도 정치권은 물론 40일도 채 남지 않은 대선 전체 판세에 벌집을 쑤셔놓고 있는 형국은 한마디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다. 실제로 이 전 총재는 출마 선언 후 평균 20%대(19%~26%)를 넘나드는 지지율로 신당 정 후보를 3위로 밀쳐내고 2위에 안착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50%대 지지율로 거침없는 대권행보를 보여 왔던 이 후보의 지지율도 많게는 10% 포인트 이상 떨어져 ‘창풍’의 위력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이명박 대세론’이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분석에 이 후보도 조금은 안도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적전분열 양상으로 치닫고 있고 또다른 핵뇌관인 BBK사건의 핵심 주역 김경준 씨가 조만간 송환돼 검찰 수사가 본격화될 경우 이 후보와 이 전 총재의 지지율에 큰 변화가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이 전 총재가 친정인 한나라당의 거센 반발과 비난 여론을 뒤로한 채 출마를 강행한 진짜 이유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두 번의 대선 출마를 했던 이 전 총재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출마를 결심한 배경에는 단순한 ‘대권병’이 아니라 반드시 대권 3수에 성공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승부 카드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이 전 총재는 7일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불안한 후보론’을 가장 큰 명분으로 내세웠다. “불안한 후보로는 정권교체가 안 되고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논리다. BBK 주가조작 등 각종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이 후보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대법관 출신으로 법조계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이 전 총재가 이 후보에게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증거를 확보했거나 이 후보가 사법처리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출마를 했겠느냐는 일반의 의혹이 일 법도 한 일이다.
이러한 의혹에 대해 이 전 총재의 대변인 격인 이흥주 특보는 8일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 증거자료에 대해 총재는 관심도 두지 않고 있다”며 일축하고 있지만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은 김경준 씨 송환을 앞두고 검찰이 기다렸다는 듯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게 왠지 석연치 않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검찰은 BBK사건을 전담할 특별수사팀을 구성하면서 고려대 출신 검사들을 배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후보가 고려대 출신인 점을 감안한 것으로 풀이된다. 검찰은 또 BBK사건을 대선 전인 내달 5일까지 신속하게 마무리한다는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져 수사 결과에 따라서는 대선정국에 또 한 차례 격랑이 일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검찰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한나라당은 벌써부터 ‘공작 수사’ 의혹을 제기하는 등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나경원 대변인은 7일 현안 브리핑을 통해 “BBK사건을 철저히 수사해 결론을 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검찰이 과연 공정한 수사를 할지 우려가 앞서는 게 사실”이라며 “검찰이 김경준 수사를 핑계로 의혹만 부풀리고 야당 후보를 오라 가라 하며 마치 범죄자 같은 인상을 지우려 한다면 한나라당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나라당 일각에선 이 전 총재가 박근혜 전 대표와 사전교감 등 비장의 카드를 치밀하게 준비했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이 전 총재는 출마 기자회견에서 박 전 대표에게 적극적인 구애의 발언을 하는가 하면 ‘개헌 카드’를 꺼내들기도 했다. 박 전 대표는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한 4년 중임제 개헌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이 전 총재가 사전 교감 여부를 떠나 향후 대선정국에서 박 전 대표와 손을 잡게 될 경우를 대비해 사전 정지작업 차원에서 개헌 카드를 꺼내든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침묵시위도 사전교감설을 부추기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이 전 총재가 출마 선언을 하던 날(7일)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경선 때 자신을 도왔던 전직 의원 및 당직자 40여 명과 오찬을 함께했다. 이 전 총재의 출마 소식을 접하고도 침묵으로 일관했고 대정부질문이 열린 국회 본회의장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강재섭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전 총재를 성토했지만 박 전 대표 측근들은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다급해진 이 후보가 핵심 측근인 이재오 전 최고위원을 2선으로 후퇴시키는 고육책을 쓰면서까지 박 전 대표 끌어안기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지만 박 전 대표는 여전히 빗장을 풀지 않고 있다. 이 전 최고위원 사퇴 직후 8일 이 후보가 직접 박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대구·경북 지역 필승 결의대회(12일) 참석 등 협조를 부탁했지만 차가운 반응을 보인 것도 예사롭지 않다.
이 전 총재와 박 전 대표 간에 사전교감설이 나돌고 있는 정황들이다. 박 전 대표 측은 “말도 안 되는 소설”이라며 사전교감설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경선 승복 연설에서 밝힌 것처럼 박 전 대표의 원칙에 변함이 없다는 논리다.
▲ 이명박 후보는 이 전 총재의 출마로 큰 타격을 입었다(왼쪽), 박근혜 전 대표는 이 전 총재와 연대할 가능성도 있다. | ||
다만 결정이 늦어질 경우 자신의 선택에 따른 시너지 효과가 그만큼 반감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결단을 앞당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이 후보와 박 전 대표 사이의 정치적·인간적 앙금이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패어 있다는 점으로 미뤄 박 전 대표가 이 전 총재의 손을 들어 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 박 전 대표 측 L 의원은 최근 기자와 만나 “박 전 대표는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 후보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 후보가 지금은 아쉬운 마음에 박 전 대표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대권을 거머쥐면 토사구팽할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L 의원은 또 “박 전 대표 스스로 이 후보의 정치 스타일과 권력 속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만큼 전략적인 선택을 할 것으로 본다”며 “이 후보가 BBK사건 등으로 치명상을 입게 될 경우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으로 이 전 총재와 박 전 대표가 각각 대권과 당권을 지분으로 연대를 추진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덧붙였다.
이 전 총재가 뒤늦게 대권경쟁에 뛰어든 배경에 비장의 승부카드가 숨겨져 있는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이 전 총재의 출마로 대선정국이 극도의 혼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또 정치는 생물이고 변화무쌍한 대선정국의 가변성에 비춰볼 때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결국 대선정국의 또다른 핵뇌관으로 거론되고 있는 BBK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와 맞물린 이 후보와 이 전 총재의 지지율 전쟁이 두 사람의 대권명운을 결정짓는 1차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이 전 총재의 대권3수 카드가 찻잔속의 태풍으로 그칠지 아니면 대선정국을 빅뱅으로 몰아넣는 메가톤급 폭발력을 발휘할지 연말 대선 판세를 좌우하는 최대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