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의 BBK 공방이 대선 막판까지 이어질 조짐이다.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김경준 씨.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범여권은 BBK 사건을 최대한 한나라당 이 후보와 연결시켜, ‘이명박 대세론’에 종지부를 찍고 대반전의 기회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BBK 사건과 이 후보의 연계 자체가 원천적으로 정치공작이라며 여권의 전략에 맞불을 놓으며 대세론을 지켜낸다는 방침이다. BBK 사건 해결 없이 치러지는 대선은 흡사 뇌관을 제거치 않은 시한폭탄을 안고 가는 형국이라는 말도 나온다. 검찰이 언제 어떤 수사 결과물을 내놓을지 또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 쉽게 예단할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검찰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BBK 사건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혈투는 대선 막판까지 이어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여기에 에리카 김 등 김 씨 가족들의 추가 폭로 내용도 초미의 관심사다. BBK 사건이 대선 정국에 변수가 아닌 상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형국이다.
대선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BBK 사건이 과연 대폭발을 일으킬지 아니면 불발탄으로 그칠지 초겨울 한파가 무색할 정도로 그 열기를 더해가고 있는 BBK 정국 속으로 들어가 봤다.
김경준 씨의 송환과 구속으로 서서히 뚜껑이 열릴 듯하던 BBK 사건의 판도라 상자는 여전히 연기만 무성하게 피워 올릴 뿐 열릴 줄 모르고 있다. 송환 일주일이 다 돼가도록 주장과 의혹만 난무할 뿐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런 가운데 김 씨 가족들과 범여권이 새로운 의혹을 뒷받침하는 증거 자료를 잇따라 공개하면서 사건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후보로서는 BBK 사건이야말로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다. 물론 겉으로는 ‘모든 것이 김경준 씨의 조작이며 자신은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 후보는 22일 MBC TV를 통해 방영된 정강정책 연설에서 “자녀 위장 취업 문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죄송하지만, BBK 문제는 자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피해 당사자들이 내게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왜 정치인들이 문제를 삼느냐. 이면계약서가 있다면 왜 지난 3년 반 동안 내놓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있다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냐”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22일 오전 김경준 씨의 누나 에리카 김이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 후보 측 선대위는 비상이 걸렸다. 후보 비서실은 물론이며 공보상황실, 클린정치위원회, 방송팀, 공보단 등에서 즉각 모니터링에 들어갔고 전략홍보조정회의도 소집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나경원 대변인과 클린정치위원회는 당사에서 반박 브리핑을 가졌다. 당이 총출동한 셈이다.
▲ 연설 중 물을 마시는 이명박 후보. | ||
뿐만 아니라 지지율 조사에서도 BBK 사건은 이 후보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앙일보>의 조사 결과(20일부터 사흘간 지역별로 500명 이상씩 조사. 최대 허용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1.7%), 전국적인 지지율에서 이 후보는 40.3%를 차지해 이회창 무소속 후보(19.2%),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12.7%)를 누르고 여전히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BBK 사건에 이 후보의 연루 의혹이 드러날 경우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응답이 39.8%, ‘그래도 계속 지지할 것’이 57.3%였다. 지지 철회자의 절반 정도인 53.0%는 이회창 후보를 대안으로 지지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술적으로는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이 후보의 지지율이 30%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문제는 검찰의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선거운동 기간 중 지금과 같은 정치권의 진흙탕 공방이 계속되고 김경준 씨 사건과 관련, 가족들의 폭로전이 가열될 경우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국민들의 실망감이 증폭돼 철옹성 같았던 ‘이명박 대세론’이 점차 그 힘을 잃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나라당 선거대책위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자체 여론조사 결과 이 후보에 대한 호감도와 신뢰도는 심각한 수준으로 나빠진 것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19일 실시한 조사 결과 이 후보의 지지율은 39.8%, 이회창 후보 18.4%,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13.1%,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 7.9%, 무응답 16.4% 등으로 나타나 기타 여론조사 기관 결과와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각각 조사됐다. 하지만 이 후보 성품에 대한 호감도 조사에서 ‘비호감’이라는 응답이 51.1%로 ‘호감’이라는 응답(33.3%)보다 훨씬 높았고, ‘대통령이 되기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느냐’는 질문에도 ‘있다’(41.7%)와 ‘없다’(42.6%)가 비슷했다.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평가에서도 45%가 부정적으로 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후보 단일화마저 무위로 끝난 대통합민주신당 측으로서는 BBK 사건이야말로 대선 판세를 뒤엎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보고 공세를 날로 가열시키고 있다. 김경준 씨 귀국을 시점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벌여온 신당은 21일 김 씨 부인 이보라 씨의 미국 기자회견에 대해 “이 후보가 BBK의 실소유주라는 결정적 근거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며 승기를 잡았다는 분위기다. 정동영 후보의 김현미 대변인은 “이보라 씨 회견으로 이 후보의 계속된 거짓말이 증명됐다. 이 후보가 피노키오라면 그 코가 지구 한 바퀴를 돌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22일에는 ‘이명박 주가조작 의혹 진실규명 대책단’(공동단장 정봉주ㆍ정성호 의원)이 서울중앙지검 기자실에서 회견을 갖고 LKe뱅크가 사실상 이 후보의 단독 소유였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주장하면서 관련 자료를 공개하는 등 공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이처럼 BBK 사건을 놓고 정치권과 김 씨 측이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지만 검찰 수사는 아직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당초 가능한 한 후보등록 이전에 수사 결론을 내릴 예정이었으나 새로운 증거와 문서 감정 등으로 일정이 늦춰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김 씨에 대한 2차 구속기한이 끝나는 다음 달 5일경 김 씨를 기소하면서 가급적 수사 결과를 발표할 계획이지만 이미 후보 등록이 끝나고 대선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당에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을 밝힐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검찰 일각에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대선후보가 연루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부담감이 될 수 있고 사건이 복잡하고 정치 공방전으로 비화되고 있는 점에 미뤄 이 후보와 관련된 부분은 수사 발표에서 제외될 것이란 섣부른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검찰이 이 후보 연루 여부를 명확하게 규정할 경우 ‘이명박 대망론’은 극명하게 명암을 달리할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BBK 사건은 대선 막판까지 ‘막가파식’ 정치 공방전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후보가 기소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란 분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분위기다.
한나라당은 대선정국을 강타하고 있는 BBK 사건과 이 후보 자녀와 개인 운전기사 위장취업 논란 등이 대선 판세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고 경계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겉으로는 대세론에 지장이 없다고 호언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 초비상 경계령이 내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 김경준 씨 모친 김영애 씨가 이면계약서 ‘원본’을 들고 귀국했다. | ||
이런 가운데 보수 진영을 대변하고 있는 대표 논객으로 이회창 후보와 가까운 사이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이명박의 아슬아슬한 외통수 게임’이란 글을 통해 불안한 후보론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나섰고 이명박 후보 측의 전여옥 의원마저 “솔직히 BBK부터 후보 자녀들 취업문제까지 제 자신이 좀 짜증났다”는 심경을 토로하는 등 내부 균열 조짐도 불거지고 있는 형국이다.
한나라당이 심각한 후유증에 직면하고 있는 반면 범여권은 BBK 사건을 대세 역전의 호기로 삼겠다는 각오다. 정동영 후보 진영을 정점으로 한 범여권 핵심부 일각에서는 ‘3:3:4 구도=필승’이라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BBK 사건을 집중 추궁해 나가지만 목적은 이 후보를 낙마시키는 게 아니라 이 후보의 지지율을 끌어내려 30%대로 묶어 놓는다는 것이다. 그 반대급부로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상승해 30%에 근접할 경우 범여권은 막판 대통합으로 40% 안팎의 지지율로 대반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범여권으로서도 검찰의 수사가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이 나지 못하고 의혹이 부푼 채로 선거운동 기간 내 쟁점이 되는 것도 그리 불리한 상황은 아니다. 범여권은 김경준 씨 가족의 폭로에 상당한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며 이명박 후보 측 대응의 허점을 파고든다는 전략이다.
이와 관련 최근 기자와 만난 범여권의 한 핵심 의원은 “이명박 후보가 낙마할 경우 보수 진영은 이회창 후보 쪽으로 급격히 쏠릴 것이고 야당 탄압 논란까지 더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게임이 될 것”이라며 “BBK 사건 여파로 이명박·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30% 안팎으로 형성될 경우 두 사람은 결코 대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이 경우 범여권이 단일후보만 만들어 내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2월 대선이 불과 한 달도 채 안 남은 상황에서 시한폭탄을 장착한 BBK 사건이 언제 어떤 식으로 터질지 또 철옹성 같은 ‘이명박 대세론’과 범여권의 막판 뒤집기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국민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