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중국 장쑤성 화이안시에서 막을 내린 제11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준결승에서 박영훈 9단이 커제 9단을 상대로 284수 만에 백으로 불계승을 거뒀다. 최근 각종 세계대회를 휩쓸며 한국 기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커제를 ‘신산(神算)’ 박영훈이 무릎 꿇린 것이다.
지난 2월 제20회 LG배에서 강동윤 9단에게 1-2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던 박영훈은 중국의 탄샤오 7단과 2017년 6월(장소 미정) 타이틀을 놓고 결승 3번기로 우승컵을 다툰다. 현 국내랭킹 6위 박영훈 9단과 중국랭킹 14위 탄샤오 7단은 첫 대결이다.
박영훈 9단(왼쪽)이 중국의 커제 9단을 꺾고 춘란배 결승에 진출했다.
중국 주최 세계대회인 춘란배는 1999년 창설된 기전이다. 당시 세계바둑대회는 한국이 주최하는 삼성화재배, LG배와 농심 신라면배가 있었고 일본은 후지쯔배(도요타덴소배 세계바둑 왕좌전은 2002년 생겼다)를, 대만은 응씨배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당시에도 바둑강국을 자처하던 중국은 유감스럽게도 단 하나의 세계대회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내심 주변국들에 미안했던 중국은 세계바둑대회 창설을 서두르는데 이때 관심을 보인 것이 춘란그룹이었다. 춘란그룹은 에어컨, 오토바이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었는데 중국기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1999년 중국 최초의 세계바둑대회를 후원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중국기원은 처음으로 세계대회를 열어준 춘란그룹이 너무 고마워 나중에는 후회하게 될 조항을 계약서에 넣게 되는데, 앞으로 중국기원은 중국 어느 기업이 세계대회를 창설하더라도 ‘중국기원이 주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조항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후에 중국에서 바둑이 인기를 얻어 세계대회 창설 붐이 일어나자 중국기원은 춘란과의 약속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결국 고육지책으로 ‘주최’에 중국기원 대신 국제바둑연맹(IGF)이나 지방 협회 명칭을 집어넣어 춘란그룹의 항의를 피하게 된다. 후에 생긴 몽백합배나 백령배 주최에 중국기원 이름이 빠지게 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2016년의 마지막 세계대회인 춘란배에서도 한국바둑은 여전히 부진했다. 8강에 박영훈과 김지석이 들어갔지만 김지석이 8강전에서 중국의 신예 구즈하오에게 반집으로 덜미를 잡혀 이제 남은 것은 박영훈뿐. 그런데 4강 대진추첨에서 하필이면 현 랭킹1위인 커제를 만났다.
전성기 시절의 박영훈이라면 커제가 두렵겠냐만 박영훈도 이젠 서른을 훌쩍 넘겼다. 97년생인 커제와는 띠동갑 차이. 여러모로 불리해 보이는 상황에서 준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1도
<1도> 박영훈의 백. 1의 어깨짚음은 흑 한 점에 압박을 가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변 흑 세력을 지우겠다는 의미. 백은 벌어둔 실리가 많기 때문에 상변만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이세돌 류의 재주 있는 바둑이라는 평을 듣는 커제는 흑2~6의 탄력적인 행마로 변화를 구한다. 팻감은 흑이 많다는 의미인데….
2도
<2도> 백1로 따내 패싸움이 시작됐는데 백4는 흑6과 교환되어 큰 악수 팻감. 그만큼 백의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반증인데 백7에 흑8로 꽉 이은 것이 전투지향형 커제답지 않은 느슨한 수. 결과적으로 이 바둑의 패착이 됐다. 백11까지 이것은 백의 페이스다.(4, 9…▲. 7…1)
3도
<3도> 결과부터 먼저 말하면 흑은 A로 참을 것이 아니라 패를 계속하는 것이 좋았다. 커제는 백이 먼저 큰 손해를 봐줬기 때문에 석 점의 준동만 막으면 괜찮다고 본 것인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2도> 흑8로는 흑1로 끊어 패를 계속하는 것이 좋았다. 이 부근에서 팻감이 여러 개 나온다는 것이 흑의 자랑. 반면 백은 B 정도가 팻감이지만 흑은 C도 있어 패는 백이 견디기 어렵다. 평소 커제의 기풍은 찬스가 생기면 신랄하게 파헤치는 스타일인데 이 바둑에서는 한 템포 쉬어간 것이 결과적으로 패인이 됐다.
4도
<4도> 이후의 진행. 좌변 백 석 점이 잡혔지만 흑의 전과는 그뿐. 반면 백은 좌상귀를 깔끔하게 처리했고 11까지 상변을 시원하게 돌파했다. 이래서는 실리의 격차가 큰 바둑. 이후 박영훈은 안전운행을 통해 백3집반의 우세를 끝까지 지켜나갔다(284수끝, 백 불계승).
박영훈은 한국으로 돌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커제 9단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성기 시절 이창호 9단이나 이세돌 9단 만큼의 임팩트는 아니다. 또 최근 쉽게 무너지는 모습도 자주 봤기 때문에 별로 압박감은 받지 않았다. 얼마든지 해볼 만한 상대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박정환 9단이 더 까다롭다. 실제 세계대회 성적은 커제 9단이 더 좋지만, 실력은 박정환 9단이 낫다고 본다. 바9단의 실력이 출중하므로 곧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영훈의 결승상대는 중국의 탄샤오 7단이다. 탄샤오는 일찍부터 속기에 강하고 재주가 있는 바둑이라는 평을 들은 기사. 하지만 세계대회 우승 경험이 없고 속기파 특유의 실수가 잦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목되고 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박영훈이 지구전을 펼쳐 길게 끌고 가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춘란배의 제한시간은 각자 3시간에 1분 초읽기 5회가 주어진다. 우승상금은 15만 달러(약 1억8000만 원)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