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찬 경찰청 경비국장 업무수첩. 최순실 이름도 적혀 있다. ‘SBS 8시 뉴스’ 방송 캡처.
최근 한 방송은 경찰 고위 간부의 업무수첩을 촬영한 일부를 입수해 청와대가 경찰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업무수첩에는 ‘최순실 101단 통제 경찰관리관과 101경비단장 교체’, ‘정윤회-안봉근 경찰 인사 개입설 취재’ 등이 적혀 있었고 국정농단 인사들의 이름도 거론됐다. 101경비단은 청와대의 경호를 맡고 있다. 또 ‘다음 번 정기인사 때’, ‘7월 정기인사 시 전화 요’ 등의 인사 시점과 함께 특정 경찰관의 이름과 직위, 특정인의 사위·처남·조카라는 신상정보, ‘근무희망’, ‘추천’이라는 단어도 적혀 있어 인사 청탁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업무수첩 11개 쪽을 입수한 표창원 의원은 수첩에 적힌 인물들 가운데 김양제 경기남부경찰청장과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 채한철 전 서울경찰청 차장도 인사청탁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사에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김 청장은 “제가 101경비단에 근무해 봤기 때문에 괜찮은 이들을 추천했을 뿐”이라며 “두 명 모두 자격이 되지 않아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고위 간부뿐만 아니라 경찰 고위 간부를 거친 청와대 직원, 국회의원 이름도 적혀 있었다. 역시 인사청탁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업무 수첩을 작성한 경찰 고위 간부는 박건찬 경찰청 경비국장으로 알려졌다. 장제원 바른정당 의원은 지난 1월 9일 오후 국회 본청에서 열린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국조특위 청문회’에서 “이 노트를 작성한 사람이 경찰청에 있는 박건찬 경비국장이다”라고 밝혔다. 장 의원은 “청와대 노트 주인공을 여기에 참고인으로 불러서 이 노트가 작성된 경위와 어떻게 된 것인지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물어봐야 할 사항이 있다”며 “현직 고위직 공무원이라 웬만하면 출석할 거라 본다”고 말했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는 박 국장을 전체회의에 출석시키기로 지난 11일 합의했다.
박 국장은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다만 수첩에 적힌 경찰관들의 명단이 인사 청탁을 위해서가 아니라고 해명하며 주변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청 관계자는 “방송 내용이 악의적으로 편집됐고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있어 당사자가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박 국장은 경북 김천 출신으로 경찰대 행정학과와 일본 도쿄도립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한 뒤 경찰에 입문했다. 경북청 경비교통과장, 서울청 기동단 1기동대 단장, 경찰청 경비국 경비과장 등을 거치며 경찰 내부에서는 경비통으로 알려져 있었다. 박 국장이 청와대 경호실 경찰관리관으로 근무했던 기간인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업무수첩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청와대에 있었던 시기와 겹친다.
이 때문에 우 전 수석의 아들의 의경 보직 특혜 의혹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업무수첩에서 경찰공무원시험 결과 조작과 의경 자대배치 등에 관한 메모도 등장했다. 우 전 수석의 아들 보직 특혜 의혹은 지난 2016년 국정감사에서도 제기됐지만 코너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경찰 고위 간부의 운전병으로 발탁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경찰 내부에서도 분노가 빗발치고 있다.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예전부터 청와대의 경찰 인사개입설은 제기됐고 주변에서 인맥으로 이뤄지는 인사를 직접 볼 수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인사 청탁 정황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야 이를 증명할 증거가 나온 셈”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이 사회에서 승진을 위해서 인맥이 실력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현상이었다”며 “승진 시기가 되면 경찰관 일부는 업무 성과보다는 줄을 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들 역시 ‘경찰공무원 공채’ 관련 부정 의혹에 망연자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찰공무원 시험생들의 모임(경시모)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수험생들은 ”학연·지연·혈연을 극복하기 위해 공무원시험을 택했는데 이에 대한 믿음도 깨졌다“며 ”경찰 공채 시험에도 백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이 허탈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일부 경찰들 사이에선 이번 업무수첩을 통해 알려진 인사청탁 문제뿐만 아니라 경찰제복 변경에도 최순실 씨가 개입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경찰제복의 외부개입에 대한 논란은 예전부터 있었다. 경찰 내부에서 경찰 제복 변경을 위한 품평회가 있었고 가장 표를 적게 받은 안이 지금의 변경된 제복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는 것. 이후 변경된 제복을 입는 경찰들 일부가 새 근무복의 물 빠짐 문제를 제기했다. 이번 경찰제복의 원단을 공급한 업체가 보광직물이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보광직물의 차 아무개 대표는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시 경제사절단 명목으로 여러번 다녀온 적이 있다. 시민사회단체 역시 보광직물이 박 대통령 당선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다며 지난달에 경찰청에 경찰복 구매 관련 자료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청했다.
한편 경찰청은 박 국장을 상대로 기초 사실관계 확인을 거쳐 정식 감찰에 착수했다고 지난 10일 밝혔다. 경찰청은 박 국장 본인을 상대로 업무노트 작성 경위, 인사 관련 전화를 받은 시점과 내용, 통화 상대방 등 구체적인 내용을 조사하고서 이어 노트에 거론된 당사자 등 관련자들을 조사할 방침이다. 아울러 박 국장에게 전화를 건 상대방들이 인사 청탁한 것이 사실인지, 통화 이후 실제 경찰 인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파악할 계획이다. 그러나 경찰청은 박 국장으로부터 아직 수첩을 받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