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BK 살생부가 나돌면서 핵심 저격수였던 구여권 인사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 ||
정치권 관계자들은 ‘정호영 특검팀’의 무혐의 결정으로 거리낌이 없어진 이 대통령이 대대적인 사정 정지작업에 돌입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특히 김경준 씨 기획입국설과 관련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신여권 주변에선 ‘BBK 살생부’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기획입국에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 검찰 수사 추이에 따라서는 상당한 정치적 파문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BBK 살생부’가 ‘노무현 특검’으로 비화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BBK 살생부’는 정호영 특검팀이 이 대통령이 연루된 각종 의혹 사건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린 이후 신여권을 중심으로 파문이 번져가고 있다. 이미 한나라당은 BBK 사건을 주도했던 통합민주당의 책임론과 함께 이른바 ‘BBK 저격수’들의 대국민 사과 및 정계은퇴를 강도 높게 촉구하는 등 대대적인 특검 역풍몰이에 나서고 있다. 특검 수사에 사용된 비용(9억 6000여만 원)을 민주당이 납부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구여권 대선후보였던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을 비롯해 저격수들에 대한 고소·고발도 취하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의원들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BBK 의혹을 주도적으로 폭로했던 인사들과 특검 관련 발언자들의 발언록을 공개하는 등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고 있다. 이 리스트에는 정 전 장관을 비롯해 김효석 원내대표, 이해찬 추미애 공동선대위원장, 김현미 대변인, 최재천 윤호중 문병호 김동철 의원 등등이 올라 있었다.
검찰의 강력한 수사 의지도 전에 없이 강하다. 정 전 장관에 대한 소환을 통보한 바 있는 검찰은 정 전 장관이 소환에 불응할 경우 불구속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핵심 저격수였던 정봉주 의원을 불구속 기소한데 이어 박영선 김종률 서혜석 의원도 조만간 기소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BBK 의혹보다 구여권을 더 긴장시키고 있는 것은 김경준 씨 기획입국설에 대한 검찰의 수사 추이다. 김 씨의 입국 과정에 국가정보원과 구여권이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는 기획입국설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국정원은 물론 노무현 정권 전반에 대한 사정태풍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획입국설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 1부는 27일 김 씨의 미국 구치소 접견기록 3년 6개월 치를 넘겨받아 본격적인 분석 작업에 착수한 상태다. 검찰이 미국 법무부로부터 넘겨받은 자료에는 김 씨가 2004년 5월 LA 자택에서 미 연방수사국에 체포된 뒤 작년 11월 16일 국내로 송환될 때까지의 모든 접견기록이 담겨져 있다.
▲ 정동영(왼쪽), 김만복 | ||
신 씨가 밝힌 국정원 인사는 다름 아닌 김만복 전 원장의 비서실장을 지낸 Y 씨다.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도 지난해 대선기간 중에 “Y 씨가 김 씨의 귀국을 도왔고 Y 씨가 귀국한 뒤에는 후임인 J 씨가 에리카 김을 만나 왔다”며 기획입국설을 강하게 제기한 바 있다. 또 일부 의원들은 대선 당시 정 전 장관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몇몇 측근과 청와대 실세가 기획입국에 직접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따라서 검찰은 신 씨 등의 진술과 접견기록을 대조해 김 씨가 대선 직전에 입국한 배경에 국정원이나 구여권 인사들이 개입했는지 여부를 철저히 파헤친다는 방침이다. 검찰은 또 김 씨의 입국에 누나인 에리카 김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의 국내 송환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관련 검찰의 한 관계자는 “에리카 김이 지난해 LA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김경준 씨를 대신해 정치권 인사와 국정원 직원을 접촉했다는 일부 정황을 포착했지만 직접 조사가 불가능해 미국 법무부에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김 씨와 관련해 어떠한 정보도 수집하지 않았고 기획입국설과 관련한 자체 감찰 결과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고 김성호 전 장관이 새로운 원장으로 발탁된 만큼 국정원 개혁과 맞물려 기획입국설에 대한 실체적 진실도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일각에서 보이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 기획입국설을 비롯해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뒷조사 의혹, 김만복 전 원장의 방북 대화록 유출 사건 등 국정원 관련 사건을 수사해 왔으나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따라서 국정원 관련 의혹 사건은 이 대통령의 개혁 의지와 맞물려 새 국정원장 취임 이후에 본격화 될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과거 세풍이나 총풍, 대북송금, 불법감청 등 정보기관이 관련된 사건들은 모두 정권 교체와 내부 조직 개편 이후에 검찰 수사가 본격화 됐던 과거 전례도 이같은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기획입국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기획입국에 관여한 전·현직 국정원 고위간부들의 책임론을 앞세워 대대적인 국정원 물갈이와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특히 구여권 핵심 실세들이 연루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노무현 정권 전반에 대한 사정이 불가피 할 것이고 총선 정국에서도 확실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사상 초유로 당선인 신분으로 특검 조사까지 받은 이 대통령이 과연 대대적인 사정 칼날을 휘두를지 또 그 칼끝은 누구를 겨냥할지 ‘BBK 살생부’와 맞물려 4월 총선정국의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