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미국 스탠 퍼드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기위해 출국하면서 지지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국회사진 기자단 | ||
이 전 총재가 ‘전공’인 법률과 관련한 공부를 택하지 않고 미국 현실정치의 ‘뒷마당’인 후버연구소를 택한 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정계복귀와 관련지으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 전 총재가 후버연구소로 간 까닭은 뭘까.
사실 미국 서부 명문 스탠퍼드대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정치인들과 깊은 인연을 맺어 왔다. 5공 청산 과정에서 ‘희생양’으로 지목되면서 정치권 밖으로 밀려났던 민자당의 정호용 의원이 이곳 출신이다.
그는 90년 4월부터 92년 2월까지 후버연구소에서 기약 없는 방랑생활을 한 끝에 14대 국회에서 정치권 재진입에 성공했다. ‘5공 실세’로 막강한 권한을 누리던 권정달 전 민정당 사무총장도 ‘낙마’한 뒤 이곳에서 한동안 외유생활을 해야 했다. 지난 2000년 4•13총선에서 낙선한 이종찬 전 국정원장도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후버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생활했다.
그런데 후버연구소는 이 전 총재와 관련된 사람들과도 인연이 있어 더 흥미를 끈다. 5공 초기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던 허삼수 전 의원은 82년 후버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낸 적이 있다. 그는 86년 귀국, 88년 13대 총선(부산 동구)에서 당시 42세의 젊은 후보 노무현에게 패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허 전 의원은 후버연구소 생활 뒤 노 후보에게 패했고 이 전 총재는 노 후보에게 패배한 뒤 후버연구소로 발길을 돌린 점이 이채롭다. 또한 지난 97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돕다 ‘세풍’에 휩싸였던 서상목 전 의원(명지대 투자정보경영대학원장)도 후버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이렇듯 후버연구소는 한국 정치인들과는 꽤 깊은 인연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곳을 선택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이름값’ 때문이란 시각도 있다. 스탠퍼드대는 미국 서부의 유명한 명문으로 전체 교수의 1%(16명)가 노벨상 수상자이고 물리학 분야에서는 4년 연속 노벨 수상자를 배출한 바 있다.
또한 이곳은 미국 정통 보수파의 ‘방어 거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시 대통령도 이곳을 핵심 싱크탱크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의 최측근인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을 비롯해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 등 미국 공화당의 대표적 보수파 인사들이 이곳에서 공부했거나 연구활동중이다.
이곳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던 김광동 나라정책원 원장은 이에 대해 “후버연구소는 미국 공화당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곳이다. 연구원만 2백여 명에 이르고 일개 연구소지만 예산도 우리나라 상위권 대학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현 공화당의 브레인들이 대거 몰려 연구활동을 하며 정책자문도 한다. 이들과의 교류만으로도 훌륭한 정치감각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후버연구소가 이 전 총재의 발길을 이끈 데는 날씨와 지리적 여건도 한몫을 했다. 연구소가 있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은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처럼 1년 내내 따뜻하고 건조한 날씨가 유지된다. 서부 캘리포니아 중에서도 날씨가 가장 좋은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스탠퍼드대학은 미국인들에게도 매력적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 미국 스탠퍼드대학 캠퍼스 전경. 오른쪽 위 뾰족하게 솟은 것이 후버연구소를 상징하는 ‘후버타워’다. | ||
이 전 총재측은 “그런 것을 생각했던 적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 전 총재는 후버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명예교환교수 자격으로 연구활동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일정액의 연구기금을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관심 분야를 연구 프로젝트로 선정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세미나 등을 통해 밝힐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이 전 총재의 ‘연구활동’이 정계복귀를 위한 ‘내공쌓기’가 아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이 전 총재측은 후버연구소 선택에 대해 “이 전 총재가 직접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위에서 조언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결정했다”고 밝혔다. 또한 정계복귀설에 대해서는 “현실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게 하려면 헤리티지재단이나 하버드대로 가는 게 나을 것이다”며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당사자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이 전 총재가 후버연구소를 선택한 자체를 ‘정치적 행위’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광동 원장은 “이 전 총재가 자신의 전공 분야인 법률 관련 연수를 택하지 않고 후버연구소를 택한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아마 이 전 총재는 연구소 생활을 발판으로 한국에 돌아오면 정치와 관련된 일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코멘트할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후버연구소가 더 적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개혁파의 한 의원은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에 대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도는 것은 이 전 총재의 일부 과거 측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패막이로 그런 말들을 흘리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이 전 총재 복귀설이 계속 유효하게 된다면 그들이 대선에서 패배한 책임을 면하고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이 전 총재와 최근 통화한 한 측근은 그의 근황에 대해 “건강하고 활기차게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큰아들 정연씨가 옆에서 비서역할을 잘하고 있다. 연구활동이 1년 과정이지만 그 전에 귀국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초 기자가 한나라당의 A의원 회관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이 전 총재의 사진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A의원은 사진이 걸려 있는 사연에 대해 “아직 치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A의원의 아쉬운 시선에서 이 전 총재의 ‘그늘’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한나라당의 기류를 읽을 수도 있었다. 그 뒤 2월 중순 그 사무실을 다시 방문했을 때 이 전 총재 사진 대신 해돋이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나라당도 점점 이 전 총재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전 총재의 후버연구소가 DJ의 케임브리지대학처럼 ‘재기의 발판’이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