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많은 신촌에서는 새 대통령의 역점 과제로 경제 활성화를 꼽았다.
[일요신문] “초록색 말고 빨간 거 줘 봐”라는 70대 노인부터 “저도 해도 되나요?”라는 10대 학생까지 설문판 앞에 섰다. <일요신문>은 4일 오전 11시 30분부터 4시까지 여의도, 신촌, 종로를 돌며 1000여 명에게 “19대 대선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를 주제로 스티커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적폐청산’ ‘국민 대통합’ ‘경제 활성화’ ‘개헌’ ‘외교·안보 위기 해결’ 등 5개 역점과제를 두고 시민들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는 사안이 무엇인가를 물은 것. 정책 방향 설문도 추가로 이뤄졌다. ‘적폐청산 vs 국민 대통합’, ‘경제 활성화 vs 복지 강화’, ‘북한과의 대화 우선 vs 대북 제재 등 단호한 대처’ 등이 정책 방향 설문 주제로 올랐다. 대선 사전투표가 시작된 첫날, 시민들이 새 대통령에게 품은 기대는 과연 무엇일까.
#금융의 심장 여의도 “적폐청산이 먼저!”
여의도는 바빴다. 오전 11시 30분쯤부터 여의대로 옆 신증권가와 IFC를 이어주는 신한금융투자 후문 근처엔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인파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른바 ‘담배 골목’의 시작점에 깔린 설문판은 바쁜 30~40대 금융권 종사자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바쁘게 움직이다 빼꼼 설문판을 바라 보는 사람들에게 취재진은 스티커를 내밀고 설문 참여를 독려했다.
4일 오전 여의도 신한금융투자 후문에서 “19대 대선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설문 조사가 이뤄졌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여의도는 금융의 중심지다. 하지만 참여자의 절반 이상인 51%가 적폐청산을 숙원이라고 봤으며 경제활성화는 32%로 그 다음이었다. 여의도에서 근무하는 이 아무개 씨(35)는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이 씨는 “자유한국당의 뿌리는 새누리당이다. 지금 나라가 이렇게 된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새누리당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홍준표 후보는 새누리당을 잇는 사람이다. 이 상황에서 새누리당 때 적폐가 그대로 남아있는 자유한국당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미래도 암울할 것”이라며 “경제는 그 다음이다. 과오부터 되짚고 경제를 손봐야 한다”고 했다.
소수였지만 적폐청산보다 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도 있었다. 전 아무개 씨(43)는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국정운영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옛 정권 문제로 한바탕할 게 뻔하다”며 “이대로 계속 가다 보면 또 다른 반대 세력이 뭉치고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통합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중요한 시점이다”라고 밝혔다.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는 균형 있는 결과가 나왔다. 활발한 투자가 먼저라는 증권맨은 경제활성화를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그래 봐야 월급 받아 먹고사는 직장인’이라고 인식하는 이들에겐 복지 우선론이 강세였다. 두 입장 다 호각을 이뤘다. 안보 역시 강경 대응과 대화 타협이 비슷한 스티커 숫자를 보였다.
#대북 강경 신촌 “북에 단호하게 대처!”
중간고사 기간이 지난 신촌은 활기가 넘쳤다. 한껏 치장한 청년들은 하나둘씩 짝지어 거리를 누볐다. 오후 1시 30분 현대백화점 신촌점 앞 광장에 설문판이 놓였다. 얼마 안 돼 스티커를 든 청년들은 설문판 앞에서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4일 오후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19대 대선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설문 조사가 이뤄졌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기성세대에게 늘 ‘좌경화된 세대’로 인식되는 청년들의 설문 결과는 기존의 편견을 깼다. 압도적인 숫자가 대북기조를 강경하게 가져가자고 주장했다. 안보 설문에 참여한 80%가 단호한 대처를 골랐다. 이 숫자는 조사가 이뤄진 세 곳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오히려 노인층보다 단호했다.
대학생 호 아무개 씨(23)는 적극적 대응을 원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매번 북한 문제를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그런 자세가 계속되니까 질질 끌려가기만 하는 꼴”이라며 “전쟁이 나면 안 된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다가 당하기만 하지 않느냐. 진짜 전쟁을 막으려면 오히려 단호하고 확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김정은 국방위원장 얼굴에 스티커를 붙인 신촌 대학생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스스로를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등골 브레이커’라고 말하는 청년들은 부모에게 드리워진 그늘을 걱정했다. 설문 참여자의 52%가 경제활성화를 가장 시급한 역점과제로 뽑았다. 이 아무개 씨(여·19)는 “경제가 팍팍해서 살기 힘든 사람이 많은 게 느껴질 정도다. 부모님만 봐도 그렇다”며 “경제가 좀 활성화돼서 돈이 돌고 소득이 더 높아져야 삶의 질이 좀 더 향상되지 않겠나 싶다”고 했다.
반 아무개 씨(21)도 경제 먼저 챙겨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복지 강화보다 기업 주도의 경제활성화가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경제가 안 좋은 게 눈으로 보인다. 부모님의 한숨이 느껴지는 상황”이라며 “하지만 복지를 강화한다고 해서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 활성화 등으로 경제 전반이 살아나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복지 중심으로 경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도 팽팽하게 맞섰다. 이 아무개 씨(32)는 “돈을 서민에게 풀어야 소비가 늘어난다. 복지 지출을 늘려서 소비가 늘면 기업은 자연스레 일자리를 늘리게 돼 있다”며 “경제를 살리기 위해 복지 먼저 확충하는 게 맞다”고 전했다.
정치 방향에서는 통합보다는 낡은 폐습을 버리자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최 아무개 씨(27)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 문제가 심각하다”며 “지금만 봐도 그렇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을 철새처럼 누비는 정치인의 최근 행보는 적폐가 뭔지 여실히 보여줬다. 하루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후한 종로, “우린 됐다. 너희부터 잘 돼야지. 다만 안보부터 챙기자!”
오후 3시쯤 탑골공원 후문 근처는 노인들로 가득했다. 품이 넉넉한 정장에 중절모를 쓰고 따뜻한 햇살 아래 약주를 걸치던 그들은 설문판 앞에서 발을 멈췄다. 설문용 빨간 스티커를 내민 취재진에게 한 노인은 “빨간색 말고 초록색 줘. 빨갱이들이나 빨간색으로 하는 거야. 걔들은 술도 빨간 뚜껑에만 마셔”라고 말했다. 또 한 노인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뭐야, 초록색? 나 안철수 싫어. 빨간색 줘.” 여의도와 신촌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너도 나도 하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다.
노인 대부분은 안보가 가장 심각하다고 반응했다. 전체 참여자 가운데 45%가 안보를 첫 번째 역점과제로 꼽았다. 전 아무개 씨(76)는 “국민 통합이나 경제 살리기는 튼튼한 안보가 먼저 기반이 돼야 꺼낼 수 있는 부분”이라며 “나라가 현재 위기에 처했다. 아주 어려운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문제를 꺼내는 건 있을 수 없다. 일단 안보부터 빨리 안정시킨 뒤에 다른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4일 오후 탑골공원 후문에서 “19대 대선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설문 조사가 이뤄졌다. 박정훈 기자 onepark@ilyo.co.kr
북한과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중국에도 단호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김동규 씨(77)는 “북한이랑 대화로 해결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모든 근원은 중국에 있다. 우리가 스스로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자기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중국에게 무시 당하지 않을 정도로 국력을 키우면 북한 문제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중국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가장 큰 문젯거리”라고 했다.
여의도와 신촌 등지의 젊은 세대가 원했던 정치와 경제 방향은 종로의 노년층과 정반대였다. 세대갈등의 실체가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난 셈이다. 젊은 세대가 적폐청산을 외쳤다면 노인 사이에서는 국민통합이 대세였다. 서 아무개 씨(69)는 “늘 갈등뿐이다. 진보와 보수가 싸우고 여야가 전쟁을 한다. 신구세대의 갈등도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다”며 “나라가 굴러가려면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통합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동력도 가질 수 없다. 언제까지 후진하며 과거에 연연할 것인가. 다 같이 한마음으로 나라를 일으키는 데 힘써야 한다”고 일렀다.
젊은 세대는 노년층의 의견을 ‘박근혜를 지지하는 수구세력의 시각’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크다. 경제 방향에 대해 노년층은 젊은 세대와 다른 의견을 보였는데, 상반된 시각 속에서도 소통과 대화의 여지는 남아 있었다. 여의도와 신촌에서 경제 활성화와 복지 강화가 비슷한 지지를 얻은 가운데 유독 종로에서만 복지 강화보다 경제 활성화가 먼저라는 의견이 대두됐다. 복지가 가장 필요한 세대에서 나온 특이한 반응이었다.
김 아무개 씨(여·61)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자녀가 몇 있다. 요즘 보면 다들 참 힘들어 한다. 일자리가 없어서 애들 얼굴에 그늘진 게 보일 정도다. 어떻게든 힘이 돼주고 싶은데 도리가 없다. 젊은이들 일자리부터 늘어날 수 있게 대통령이 기업을 잘 도와줘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 얼굴이 좀 더 펴질 것 같다. 내가 받을 복지수당이 조금 더 오르는 것보다 우리 아이들 미래가 더 중요하다.”
사회부 특별취재팀(최훈민·문상현·최영지·김상래 기자)
새 대통령의 역점 과제는? “경제 활성화” 35% 이번 스티커 설문조사는 네 가지 항목으로 진행됐다. 우선 ‘19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선출된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1순위 역점과제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적폐청산’ ‘국민 대통합’ ‘경제 활성화’ ‘개헌’ ‘외교·안보 위기 해결’ 등 5개 역점과제를 두고 시민들이 스티커를 통해 의사를 밝혔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응답률은 35%를 기록한 ‘경제 활성화’였다. 불황에 시름하는 시민들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경제 활성화’였다. 대통령 탄핵에 따른 조기 대선이었던 만큼 ‘적폐청산’도 29%의 높은 답변이 나왔으며 ‘외교·안보 위기 해결’이 24%로 그 뒤를 이었다. 반면 ‘국민 대통합’은 응답률이 10%에 그쳤다. 정치권에서 가장 뜨거운 현안인 ‘개헌’은 고작 2%의 응답률을 기록해 시민들에게는 그리 급한 과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이번 스티커 설문 조사는 세대별 민심을 파악하는 데 의미를 뒀다. 20대 젊은층이 많은 신촌과 30~40대 직장인이 많은 여의도, 그리고 노년층이 많은 낙원동에서 스티커 설문조사를 실시한 것. 그 결과 세대별 민심은 전체 결과와 사뭇 달랐다. 우선 신촌에선 ‘경제 활성화’(52%)가 가장 시급한 새 대통령의 역점과제로 부각된 데 반해 여의도에선 ‘적폐청산’(51%)이 가장 많은 스티커를 받았다. 낙원동에선 ‘외교·안보위기 해결’(45%)이 가장 높았다. 아무래도 취업이 급한 청년층에선 ‘경제 활성화’가 시급했으며 직장인들 사이에선 ‘적폐청산’, 그리고 노년층에선 안보 문제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두 번째 영역은 ‘정치’ 관련 사안으로 ‘적폐청산’과 ‘국민 대통합’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시급한 사안인가를 물었다. 이 문항에서 세대별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전체적으로는 ‘적폐청산’이 70%로 높은 답변율이 나왔는데 여의도가 87%로 가장 높았으며 20대 위주의 신촌에서도 77%가 나왔다. 반면 노년층 위주의 낙원동에선 38%로 현저히 낮은 답변률이 나왔다. 경제 부분에선 ‘경제 활성화’와 ‘복지 강화’가 비슷한 답변율을 기록했다. 전체적으로는 ‘경제 활성화’가 54%로 근소한 우위를 보였다. 낙원동(59%)과 여의도(58%)에선 모두 ‘경제 활성화’가 더 높게 나왔지만 젊은층 위주의 신촌에서만 46%로 ‘복지 강화’에 비해 낮은 답변율을 기록했다. 안보 문제에선 모든 세대가 ‘대북 제재 등 단호한 대처’가 ‘북한과의 대화 우선’보다 더 높은 답변율을 기록했다. 전체적으로는 69%가 대화보다 ‘단호한 대처’를 요구했다. 낙원동에서 72%의 답변율이 나왔는데 20대 위주의 신촌에서 이보다 더 높은 80%가 ‘단호한 대처’에 스티커를 붙였다. 여의도에서만 박빙의 승부가 기록됐는데 51%가 ‘단호한 대처’를 원하고 49%가 ‘대화 우선’을 답변했다. 사회부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