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일요신문] 이상과 현실은 뫼비우스의 띠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하는 이야기 속의 이상과 현실은 정(正)과 반(反)처럼 대립의 개념이다. 서로 만날 수 없는 기찻길과도 같은... 굳이 기찻길이라 했지만 이상은 좋은 것, 현실은 그 이상 실현의 장애물로 여겨진다. 그럴 바에야 플라톤의 흰말과 검은말에 비유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장미대선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선을 두고 국민은 어떤 이상을 꿈꾸었을까? 그리고 어떤 현실의 벽을 목격했을까? 그리고 합(合)을 위한 장미대선의 키워드는 무엇이어야 했을까? 대선이 끝날 때까지 이 세 가지 물음이 늘 필자를 따라다녔다. 지난 번 글에서 국정농단사건과 탄핵, 그리고 촛불의 의미를 알아야 대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야 대선의 이상과 현실을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려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장미대선의 이상은 20세기 정치에서 21세기 정치로의 전환이었다. 21세기가 한참 지난 마당에 이 얘기를 하려니 서글프기도 하다. 냉정하게 보면 우리 정치의 현주소는 여전히 20세기의 진행형이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좋으련만. 20세기는 뭐고 21세기는 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국민은 마음속으로 짐작하고 있을 법하다. 20세기는 지금 우리의 현실 앞에 놓여있는 정치의 생생한 민낯이다. 매번 선거 때마다 망령처럼 떠도는 이념논쟁, 정치가 뭔지도 모르는 정치, 소신 없는 권력바라기들, 터널 속에 갇힌 정치문화와 정치의식수준, 분열과 갈등이다. 반면 21세기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이다. 내일로부터 전해오는 소중한 가치에 대한 논쟁과 그 가치를 실현하는 정치,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새로운 정치세력, 국민이 참 정치주체세력이 되는 정치문화와 의식, 개혁과 공유다.
다시 장미대선으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는 실패한 보수집권 패러다임의 ‘개혁’을 기대했고 누군가는 이 땅에 정의가 뿌리내리기를 갈망했다. 또 누군가는 진정 통합의 계기가 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빈 깡통소리만 요란한 낡은 검의 승부만 있었다. 어느 정당 후보는 우익정권수립이란 명분을 내세워 역겨운 사상논쟁의 칼날을 들이댔다. 그렇다면 진보는 달랐을까? 소위 진보를 자청하는 세력들의 속 깊은 고민을 볼 수도 없었다. 집권세력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에 대한 냉정한 성찰 말이다. 그런데도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듯 정권교체만 외쳤을 뿐 알맹이 있는 개혁의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개혁을 위한 교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교체는 개혁이 아니다.
세심한 독자라면 빠진 한 가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바로 중도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중도가 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이념 스펙트럼의 중간쯤에 와 있는 그 무엇일 수도 있을 테고, 양 끝을 연결하는 고리일 수도 있을 테다. 그것도 아니라면 양쪽과 다른 새로운 세력일 수도 있다. 장미대선 직전에 있었던 프랑스 대선에서 돌도 안 된 신생정당 앙마르슈의 마크롱 후보가 당선되었다. 필자는 우리나라에도 혹여 그런 기적이 가능할까를 생각해 봤다. 보수는 나쁜 관행에 젖어있고 진보는 대안세력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또 대선과정에서 본 민심이념좌표의 흐름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중도는 원했든 아니든 간에 스스로를 좌와 우의 극단적 대립구도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이 상항에서 플라톤의 마부는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필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지만 우리 국민은 아직 그런 기적을 만들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이처럼 장미대선의 현실은 ‘좌와 우에서 중도’라는 국민의 이념좌표의 변화와 의식의 흐름을 전혀 읽지 못한 이념논쟁의 투기장이었다. 게다가 이기적인 권력정치의 주도세력이 되려는 보수와 진보는 온 나라를 둘로 갈라버렸다. 그 와중에 중도와 개혁보수의 외침은 맥이 빠져버렸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기대는 소외되었다. 아, 아니무스 도미난디(animus dominandi)여! 프로도가 되어 탐욕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녹여 만든 절대권력을 민심의 거대한 용암 속으로 던져버릴 수만 있다면...
필자가 장미대선에서 학수고대했던 말은 개혁과 공유다. 다 지난 일이지만 반 전 총장의 일성도 정치개혁이었고 유 후보와 안 후보의 일성도 개혁이었다. 말 뿐은 아니었을 텐데, 그 다음 얘기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양극의 틈바구니가 버겁긴 했겠지만 개혁에 대한 고민의 흔적과 답을 내놓았으면 좋으련만. 우선,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의 대상성이다. 국가시스템 전반의 개혁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국방 등 전 영역은 물론이고 정치지배구조, 정치제도와 관행, 권력정치의 내재적 모순의 탈바꿈이다.
둘째,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가의 수단성이다. 패러다임의 과감한 전환이 필요하다. 토마스 쿤의 얘기처럼 그것은 시나브로 오는 게 아니다. 마치 혁명과도 같다. 혁명이란 말에 화들짝 놀랄 국민도 있을 터다.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광화문에서 추는 팔뚝 춤이 아니라 헌법 개정을 통해 담아내면 족하다. 분명 개정 헌법은 48년 체제의 극복, 정치·사회구조와 권리·의무 등의 전면적인 변화의 내용을 규정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셋째, 누가 개혁할 것인가 하는 주체성이다. 개혁의 주체세력은 국민이다. 촛불에서 읽었듯이 개혁은 국민 스스로 의식을 깨울 때 가능하다. 동시에 사회체제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 진화한 정치주도세력이 나타나야 한다. 넷째, 개혁을 통해 어떤 사회로 갈 것인가 하는 방향성이다. 그것은 사유(私有)의 사회에서 공유(共有)의 사회로, 단절의 사회에서 관계의 사회로, 이익중심 사회에서 가치중심 사회로의 변화다. 다섯째, 무엇을 이룰 것인가의 목적성이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바로 정의로운 공동체의 구현과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의 실현이다. 또 세계무대의 중심에 서는 대한민국의 건설이다.
한편, 필자가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 중 하나가 공유다. 공유는 공론의 장을 필요로 한다. ‘골목’이 필요하단 뜻이다. 웬 골목이냐고들 하겠다. 그 옛날 골목은 서로 오가며 마을공동체의 대소사를 논하던 마당이요,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던 장소다. 또 사적인 이해관계보다는 공적인 이해관계를 우선하던 공간이었다. 회나무 아래 들마루처럼. 물리적 공간도 공간이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또 관계 속에 존재하는 공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의 눈에 비친 폴리스와도 같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그런 골목을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곳을 가나 ‘담장 밖과 가게 앞’처럼 사유와 사적 이익이 넘쳐나는 세상이 돼 버렸으니 당연하기도 하다. 정치의 존재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의 역할은 공허한 광장에 모인 대중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여 있으면서도 서로가 관계되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람들 간의 유대를 발견하는 방법, 즉, 기독교의 형제애를 불어넣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했을까. 정치가 바로 이런 걸 고민해야 하는데, 권력쟁취에만 혈안이 돼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장미대선을 비판하는 이유는 ‘혹시나 이상’이 ‘역시나 현실’ 앞에 주저앉은 탓이다. 필자는 솔직히 제3세력이 탄생되기를 기대했다. 현재의 진보와 보수로는 개혁과 통합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통합은 이념논쟁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이념의 반쪽만 가지고 무슨 통합을 이루겠는가 말이다. 통합이 안 되면 공유는 ‘정치가 사라진 21세기의 근대’ 라는 소설 속 허망한 꿈일 뿐이다. 필자는 장미대선을 지켜보면서 에피쿠로스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도 글을 쓰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뫼비우스의 띠 때문이다. 띠의 중심을 따라 가다보면 처음엔 반대쪽에 도달하지만, 계속 가다보면 다시 처음과 만나게 된다. 장미대선에서 우리의 이상이 현실의 벽을 만났다면, 다음 대선에서는 그 벽을 넘어 더 나은 이상과 만날 수 있으리란 한 가닥 희망을 품은 까닭이다. 부디 우리 국민이 의식을 깨고 스스로 정치의 주체임을 깨닫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 의식을 깨우기에 필자의 펜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타올랐으니 기대를 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한다. 밝은 새벽을 알리는 청명한 닭의 울음소리처럼.
* 이지상 / 연세대 정치학 석사
경북대 정치학 박사과정 수료
전 국회의원 보좌관
현 경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