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일요신문] 지난 대선이 끝나고 이상한 지도 하나가 생겼다. 늘 봐오던 터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유독 경상도 땅이 붉다. 박빙이었던 경남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건 대구경북이다. 그 지도를 마주한 첫 느낌은 스스로 만든 고립이었다. 닫힌 지리적 경계의 답답함이고 과거의 영광에 함몰된 안타까움이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애써 감추려는 어리석음이다. 혼자서 갈 길 몰라 헤매는 것만큼 허탈한 게 또 있을까 싶다.
주변에서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얘기들을 한다. ‘같은 경상도’라는 외에 다른 까닭을 찾기란 쉽지 않다. 굳이 정치이론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원했던 아니든 예부터 보수의 씨를 뿌리고 키워 온 텃밭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한 방향으로 굳어버린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 흔히들 보수를 ‘지키는 것’, ‘안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진보는 ‘허무는 것’, ‘불안정’이란 말인가. 누가 이런 도식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심하기 짝이 없다. 좋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누구로부터 뭘 지킨다는 것인지, 어떤 상태의 지속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 대구경북은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 그저 긴 세월 ‘당연함’ 속에 갇혀있었던 탓이다. 때문에 자신들이 집권하지 않으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선동했던 자유한국당과 홍 후보의 이데올로기 프레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무런 통찰도 없이 그저 그렇게. 역사의 나락으로 떨어진 수구의 뒤끝을 목격하고도 말이다. 필자도 경상도 사람이지만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다. 솔직히 말해 지난 대선에서 드러난 대구경북의 민망한 속살은 실패한 수구세력의 지킴이였다. 더 보태고 뺄 것도 없다.
여기쯤에서 대선 때 본 대구경북의 실상을 솔직히 고백해 보자. 쓴 소리에 언짢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읽어주었으면 한다.
첫 번째 실상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몹쓸 보수정치가 만들어 놓은 담장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다. 먼저 글에서 장미대선의 의미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진화라고 했다. 하지만 대구경북은 곰팡이 슨 20세기의 틀에서 벗어날 생각을 좀체 하지 못했다. 핑계거리를 찾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에 골몰했을 뿐이다. 좌파가 집권하면 대한민국을 통째로 말아먹고 배신자에게 정권을 맡길 수는 없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하나다. 밑도 끝도 없는 우익정권수립이다. 세상과 단절한 채 대구경북의 힘만으로 말이다.
TV를 통해 우물 밖 소식을 접하고 타 지역을 다니며 보고 들었을 텐데도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 아직도 호남과 핑퐁게임을 하거나 죄수의 딜레마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보수를 지킨다는 묘한 자부심만 보인다. 보수만 세상을 구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며 새로운 광명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희한한 것은 그 믿음이 ‘무조건’이란 점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는 물음은 고사하고 토를 달아서도 안 된다. 그게 전부다. 과거 ‘노빠’를 얼마나 조롱했던가. 지금 밖에서 대구경북을 그와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텐데, 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이러면서 어떻게 발전을 바라고 내일의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레베카 코스타의 지적처럼 현대문명이 위기를 맞는 이유는 닫힌 사고 때문이다. 지금 대구경북이 딱 그렇다. 약 2200년을 존속했던 로마제국의 힘은 개방이었다. 길거리 무희가 왕비(테오도라)가 되고 시리아 출신이 황제(엘라 가발루스)가 될 정도였다. 이웃 소민족을 배척하기보다 그들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오히려 로마화(제국의 구성원이 됐다는 자부감의 형성)를 이루었다. 변화에 둔감한 민족은 도태되고 빗장을 걸어 잠근 제국은 망한다. 그게 역사의 교훈이다.
두 번째 실상은 자유한국당의 의미 없는 대권 도전을 위한 들러리였다. 이 말에 발끈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면 아니란 말인가? 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한 가지 짚어보자. 520만 시·도민 중에 진실로 탄핵이 부당하고 박 전 대통령과 모박(模朴)정치인들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사람이 절대다수인가? 자유한국당의 쇄신노력을 가슴으로 느낀 이들이 많을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을까? 그리고 진심으로 자유한국당이 대권에 도전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거짓도 문제지만 그 거짓을 마냥 덮어두려는 게 더 큰 문제다.
인지상정에 젖어 용서해 줄 일이 아니다. 진실로 보수의 재건을 원했다면 냉혹한 채찍을 가했어야 한다. 정신 차리라고 말이다. 국기문란사건에도 또 다시 수구가 집권해야 한다는 주장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동의할 지를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대선은 지역 대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지도자를 뽑는 큰 마당이다. 이를 망각하지 않고서야 제갈량을 흉내 낸 동남풍에 땜질한 돛을 올릴 수는 없다. 그 배는 낙동강을 건널 수 없고 동남풍은 소백산맥을 결코 넘을 수 없었는데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우리가 남이가’, 이제 이런 것 좀 과감히 걷어냈으면 좋겠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끌었던 대구경북이 뭐가 모자라서 들러리를 서느냔 말이다. 이런 현상을 주객도치라 한다. 정치무대의 주연이어야 할 시·도민이 되레 조연이 됐다. 언제까지 낡은 수구의 염치없는 응석을 받아주어야 하는지를 자문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 속에 왜 보수가 실패했는지에 대한 답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실상은 잘못 뽑은 후보에 열광한 신봉자들이었다. 홍 후보는 자질도 부족하고 역량도 부족하며 아무런 준비가 돼있지 않은 후보였다. 모두들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나라와 국민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계기가 돼야 할 대선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언어유희와 꼼수의 대가다운 면모를 과시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갔으면 자중하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고 올 일이지, 또 고질병이 도졌는가 보다.
그뿐인가. 이상한 현수막도 내걸었었다. 기억들을 할지 모르겠다. ‘까막눈 엄마, 경비원 아빠를 둔 자식도 대통령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 하면 그동안 그런 부모를 둔 탓에 대통령이 못 됐고 좋은 부모를 두지 못한 죄로 성공할 수 없었다는 얘기 아닌가. 홍 후보의 얘기대로 정말 그렇다면 누구든 자신을 탓해야지 한 평생 자식 위해 고생하신 부모를 탓해서는 안 된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웃지 못 할 일은 또 있다. 홍 후보와 친박들이 대선 이후에 서로 물고 뜯는 장면을 연출했다. 돈이 모자라서 선거홍보를 제대로 못했다던 그들이 무슨 돈으로 민망한 드라마를 찍었는지 모르겠다. 대선 때는 가만히 있더니 패하고 나니까 그 책임을 서로 떠넘기기 바빴다. 뭔가 잘못을 하긴 한 모양이다. 그러면 홍 후보는 자신의 말대로 ‘한국보수세력을 망가지게 한 세력, 박 전 대통령과 같이 탄핵된 세력들’을 모아놓고 표를 달라고 한 셈이다. 우익집권을 위해 대구경북으로 하여금 들러리를 서달라고 대놓고 요구한 거다. 거기에 대구경북은 또 응해주었고.
다른 후보를 찍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그래도 양반이다. 왜 홍 후보를 지지해야 하는 지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그냥 ‘홍찍자’였다. 소비자들이 상술에 넘어가듯이 유권자들이 정치술에 넘어간 거나 다를 바 없다. 어떤 일에 맹목적이거나 비상식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심하게는 광신도에 비유한다. 이 허물까지도 벗어던져버려야 한다. 시·도민의 자부심은 누가 지켜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 지켜야 한다.
520만 시·도민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이나 감싸준 사람이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궁색한 변명으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대선 때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면 필자는 이렇게 답한다. 썩은 고목은 이제 그만 내려놓고 새로운 싹을 틔우면 되지 않느냐고.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면 앞으로는 똑 바른 길로 가야 한다. 「서경」 중훼지고편에 개과불린(改過不吝)이란 말이 있다. 과를 고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변화는 과거와 현재의 과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야 발전도 있고 진화도 있다.
다음 기회에 필자를 포함한 대구경북 시·도민 전체를 향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대안을 함께 모색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 이지상 / 연세대 정치학 석사
경북대 정치학 박사과정 수료
전 국회의원 보좌관
현 경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