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일요신문] 대구경북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때 늦은 물음이지만 더 늦기 전에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공론화시켜야 한다. 그것은 고루했던 과거에 대한 뉘우침이요, 세상의 변화에 동참하는 문턱이기 때문이다. 그 답을 구하기 전에 몇 가지를 자문해봤으면 한다. 장미대선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대구경북의 실상을 통해서 말이다. 탄핵이 ‘보수’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면, 장미대선은 그 보수를 재평가했던 탓이다.
첫 번째는 ‘왜 자유한국당인가’다. 이 속에는 언제까지 우익지킴이의 불편한 가면을 쓰고 있을 거냐는 채근이 숨어있다. 하니 당명을 바꾼 지 얼마나 됐냐는 반문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유당, 민정당에서 민자당, 한나라당을 돌아 자유한국당까지 온 카멜레온 당명이야 중요치 않다. 대구경북은 보수의 온상이다. 그런데 그 보수는 진짜가 아니다. 보수의 탈을 쓴 수구세력, 이데올로기에 찌든 반공세력임이 온 세상에 드러났다. 게다가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지역감정 조장과 깃대 꼽기, 편 가르고 줄 세우기, 뒷돈정치, 보복정치, 기업 옥죄기만 했을 뿐. 그들의 정치공장에서는 분열과 갈등만 뿜어냈다. 이 뿐이 아니다. 과거엔 전봇대도 공천만 받으면 된다고 했다. 이젠 과메기까지 왔다. 아직도 더 남아있는지 궁금하다. 밖에서는 조롱거리가 돼버렸는데도. 참 속상하다.
이왕 하나만 더 얘기해보자. 지난 4·12 재보선 때다. 결과(상주·군위·의성·청송)를 두고 웃지 못 할 자평들이 쏟아졌다. 20대 총선 결과(77.7%)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47.5%)을 들고 ‘자유한국당의 화려한 부활’이란다. 누가 들어도 억지요 자만 아닌가. 그러자 ‘성 후보의 표를 합치면 74%가 넘는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기가 막힌다. 그게 자신들의 한계인 줄도 모르고. 18대 대선(TK 80.5%)의 겨우 반쪽을 면한 대선 결과(TK 47%)가 말해준다. 존 롤스의 원초적 인간이 떠오른다. 무지의 장막에 갇혀있는. 그 인간은 순수하기라도 하지 그들은 권력에 눈먼 탐욕스런 존재다.
이런 낯부끄러운 행태를 그렇게 겪고도 아직 대구경북은 깨닫지 못한다. 그만둘 생각도 없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의무감 때문은 아닐 테고, 새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는 탓이다. 그래놓고 정치만 탓한다. 때가 되면 멍석을 펴주면서 말이다. 그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지 않을까. 누구를 탓할 게 아니다. 탓해서도 안 된다. 시·도민이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과연 이 땅의 닳고 닳은 수구에 희망이 남아 있는지.
두 번째는 ‘우리가 남이가’다. 이제는 우스갯소리를 넘어 아예 속담이 돼버렸다. 문제는 경상도 사람끼리만 뭉치면 된다는 사고다. 이기적이고 옹졸하며 편협하다.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짧음이며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우견이다. 해 놓은 게 없기는 수구나 대구경북이나 매한가지다. 그렇게 뭉쳤으면 대구경북을 세상이 부러워하는 낙원으로 만들든지, 대한민국 정치 발전의 발원지로 만들든지 했어야 한다. 이걸 못한 건 선거 때만 뭉쳐서 그렇다. 게다가 표를 찍고 나면 손을 뗀다. 유권자로서의 도리는 다 했다는 얘기다. 하면 정치주체로서의 역할과 도리는 어쩌고.
위기의식도 없고 책임의식도 없다. 그저 또 한 번의 선거가 지나갔을 뿐이다. 지키지 못한 걸 원망해야 하건만 뺏긴 것이 억울한 모양이다. 되레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비난이나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적어도 그들은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읽었으니 말이다. 수구지킴이들이 투기를 했다면 그들은 투자를 한 셈이다. 우리가 남이가의 효력은 수구의 몰락과 함께 끝이 났다. 소외만 초래했다. 세상으로부터의 소외고 정치로부터의 소외다. 어찌 이리 근대적 인간의 모습과 닮아있을까. 칼 맑스가 노동의 결과물로부터의 소외를 얘기했듯이 정치의 중심으로부터 소외됐다. 또 에릭 프롬의 눈에 비친 체제로부터의 소외처럼 대한민국으로부터 소외됐다. 이제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자면 소용없는 몽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세 번째는 ‘어떤 게 사표인가’다. 대선 당시 모두들 흥분하며 말했다. 유 후보 찍으면 사표라고. 왜 사표냐고 물었더니 유구무언이었다. 그래서 홍 후보를 찍으면 왜 사표가 아니냐고 물었다. 답이 없다. 이유가 마땅치 않으니 당연하다. 아마도 정권연장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동남풍이 제자리 돌개바람인지도 모르고. 굳이 이유를 찾자면 안 될 사람 찍으면 무용지물이란 거다. 그리 따지면 홍 후보도 어차피 안 될 사람이었으니 모두 사표가 된다. 대구경북의 몰표를 받았더라도 당선될 일은 없었으니. 톡 까놓고 말해 2등을 선택한 표가 진짜 사표다. 타락한 수구붙박이 표는 아무런 명분도 의미도 없다. 새로운 희망과 기대에 대한 투자도 아니고, 새로운 힘과 가치를 담아내지도 못했다. 자격 없는 집권에 대한 투기였을 따름이다.
더 이상 새로운 도전과 선택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하니 이제 찍어줘도 안 될 것 같다는 말은 그만했으면 한다. 찍어주고 그런 얘기를 하면 덜 답답할 텐데, 그 전에 될지 안 될지를 어떻게 아는가 말이다. 선거는 다 된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 게 아니다. 그 밥상을 직접 차리는 거다. 선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될 사람을 찍지 말고, 될성부른 나무를 택하면 된다.
분명 대구경북은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김치는 숙성될수록 깊은 맛이 나지만, 권력정치는 오래될수록 썩기 마련이다. 이제 의식을 깨우자. 그리고 과감히 행하자.
우선, 해방 이후 수 십 년 동안 우익수구가 씌운 답답한 갑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언제 될지 모를 통일 때까지 입고 있을 건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수구세력을 향한 기대는 접어야 한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말해주고 있다. 수구는 심연 속의 타성과 관성에 젖어 변화 자체를 거부하며 매번 똑같은 옷을 갈아입는다. 필자는 장미대선의 결과를 스스로 만든 고립이라고 했다. 그 고립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우물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행복보다는 불행, 진화보다는 도태, 중심보다는 주변을 마주하게 된다는 거다. 새 옷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 모든 변화는 그렇게 온다.
둘째, 520만 시·도민의 손으로 수구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통합의 보수, 정의로운 보수, 희망의 보수가 태어난다.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향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을 키워야 한다. 정치의 주체이면서 주변을 맴돌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대의제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까지 위임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는 당당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껏 우주의 중심이란 착각에 빠져 살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변화는 혁명(오해 없기를 바란다)을 수반하며, 그 혁명이 발전적 역사의 흐름을 만든다. 생각해 보자. 국민주권도, 인간의 존엄성도 가만히 앉아서 얻은 게 아니다. 개혁을 넘어 정치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1964년 공화당의 대선 참패 후 보수주의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게 했던 미국 국민들처럼.
셋째, 어떤 길을 걸어갈 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미래는 녹록치 않다. 현재 대구경북이 어떤 위치에,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지를 냉철히 봐야 한다. 그리고 눈을 들어 내일을 바라보고 여태 꾸지 못했던 꿈을 꿔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는 법이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언제 하냐고들 한다. 앞으로 길게는 10년이란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을 어떻게 쓸 지를 지금부터 계획해야 한다. 권력역병에 빠진 수구가 벌인 만찬에 넋 놓고 광대 춤을 출 때가 아니다. 옳은 정치세력의 묘목을 거목으로 키워야 한다. 볕도 쬐어주고 물도 주고 자양분도 공급하면서. 그렇게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 프랑스 정당 앙마르슈의 기적은 깨어있는 국민이 만들었다.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제 대구경북도 달라질 때가 됐다. 알을 깨고 나와야 산다. 갇혀있으면 번데기로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제발 남 탓 그만하고 자신을 먼저 살피기를 바란다. 이를 절집에서는 조고각하(照顧脚下)라 한다. 그래야 변화의 힘찬 물줄기를 만들고 미래 정치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참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시대정신을 먼저 읽고 변화를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어리석은 정당’이라고 했던 영국의 보수당은 20세기를 보수주의의 시대로 만들었다. 그 힘 역시 의식을 깬 영국 국민이었다.
이처럼 대구경북도 대한민국의 새로운 정치의 텃밭이 돼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그것이 대구경북의 역사와 520만 시·도민의 자부심을 온전히 유지하는 길이다. 부디 잠든 의식에서 깨어나 신천지로 나아가기를.
* 이지상 / 연세대 정치학 석사
경북대 정치학 박사과정 수료
전 국회의원 보좌관
현 경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