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군 축구협회에 따르면, 영해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축구와 인연을 맺은 신태용 감독, 어릴 적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선배들은 넘가하는 기량을 펼쳐 보였다. 그의 기량은 학년이 올라가면서 더욱 눈부시게 발전했다. 신 감독이 초등학교 6학년 당시 대구광역시는 경상북도에 속해 있었다.
모든 게 부족하고 어두운 시절, 이름도 없는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축구를 배운 신 감독, 고작 해봐야 대구에서 펼쳐지는 도내 대회 출전이 전부였다. 신 감독의 첫 번째 스승은 김칠복 선생이다. 정식으로 축구선수 생활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교직생활을 병행하면서 어린 축구선수들을 지도했다. 현재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경북 안동시에 거주하고 있는 김칠복 선생은 최근 신 감독의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뻐했다.
“태용(신)이는 어릴 적부터 축구도 잘했지만 영리하고 똑똑해서... 다른 애들보다 일찍 축구를 시작했는데 형들보다 실력이 더 좋았어! 태용이 집이 학교(영해초) 근처였는데 연습이 끝나도 태용이는 동네 형들과 밤늦도록 축구를 하고 해서 그래서 내가 야단도 많이 친 기억이나…” 이렇듯 신 감독은 스승이 기억한 것처럼 어릴 적부터 축구 밖에 모르는 그런 축구에 미친 소년이었다.
신 감독은 영해초를 졸업하고 영해중에 진학했다. 하지만 2학년 때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친구들 10여명과 함께 인근 강구중 축구부로 전학했다. 두 팀을 합쳐놓은 강구중 축구부 전력은 경상북도를 제패했고, 소년체전 본선에 진출하는 등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신 감독은 강구중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당시 경상북도로부터 대구광역시가 분리되면서 대구공고 진학을 위해선 대구시내에 위치한 중학교 전학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3학년 2학기 때 경북사대부중으로 또 다시 전학했다. 이후 대구공고 유니폼을 입고 ‘신태용’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시작했다. 대구공고 3학년 때 팀 창단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과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면서 당시 대구공고 출신의 전두환 대통령이 후배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열어주는 일화도 유명하다.
신 감독의 다음 행선지는 영남대였다. 대구공고 시절 이미 U-16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 감독은 연-고대 등 수도권 명문 팀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고향을 저버릴 수 없었다. 영남대 재학당시 실업팀과 대학팀들이 모두 참가하는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신 감독은 대표팀 차출로 4강과 결승전에만 출전했다. 국민은행과의 결승전에서 신 감독은 결승골의 주인공이 됐고, 만년 하위권에 머물렀던 팀을 우승으로 견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각급 청소년대표와 올림픽대표를 두루 거치며 한국 축구의 대들보로 성장했다. 1992년엔 A대표팀에 승선했다.
1992년 천안 일화천마축구단(현 FC성남)에 입단하며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첫 해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며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이후 성남일화 한 팀에서 2004년까지 활약하며 ‘성남의 레전드’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프로생활 13년여의 시간 동안 신 감독은 총 9회 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됐고, 2001년엔 리그 MVP(최우수선수)로 등극했다. 2003년 K리그 역대 최초로 60골-60도움 고지를 밟은 그는 2004년 개인 통산 68개 도움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프로통산 99골을 써 내리기도 했다.
2004년 국내에서 은퇴 후 호주에서 선수와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신 감독. 그리고 마침내 2010년 2월 성남 일화 감독에 정식으로 취임했다. 승승장구했다. K리그 제패와 2010년 ACL 정상에 올랐다. 1996년 선수로서 아시아 슈퍼컵 정상을 맛봤던 신 감독은 선수, 감독으로 아시아 정상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됐다. 이듬해엔 FA컵에서 최정상에 오르는 기쁨도 맛봤다.
신 감독은 2014년 8월 A대표팀 코치로 선임됐다. 하지만 감독 대행 성격이 짙었다. A대표팀을 이끌고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와 평가전을 치렀다. 신 감독만의 공격 축구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후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A대표팀 사령탑에 앉으면서 코치보직을 맡은 신 감독은 2015년 2월, 고 이광종 감독의 후임으로 올림픽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2016년 리우올림픽 8강으로 이끌었다.
신 감독에게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국내에서 개최된 U-20 세계월드컵이었다. 전임 안익수 감독 체제가 붕괴되면서 또 다시 소방수 역할이 주어졌다. 본선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신 감독은 짧은 시간 전력을 극대화 시켰다. 이승우-백승호 등의 해외파와 국내선수들을 조합시켜 주어진 6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을 시켰고, 그 결과는 ‘2017년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 16강에 올랐다.
축구인생 최고의 길만 걸어온 신태용 감독, 그리고 마침내 한국축구 최고의 자리인 A대표팀 지휘봉이 신 감독에게 맡겨줬다. 지금 한국축구는 위기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에도 사실상 소방수다. 그러나 의미가 다르다. A대표팀의 무게. 신 감독은 짊어질 준비가 돼있다.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 이를 증명한다.
영덕이 낳은 아들 신태용 감독, 그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고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영덕은 지난 몇 년 전부터 학원축구 전국대회 유치를 통해 축구고장의 명성을 알리고 있다. 신 감독은 자신을 나아주고 후원해준 영덕 고향이 늘 자신에게 큰 힘이 된다고 한다.
영덕군축구협회 박진현 회장은 “후배인 신태용 감독이 정말 자랑스럽다. 어린 시절부터 봐 왔지만 이렇게 크게 성공할 줄 몰랐다. 신 감독은 지금도 시간이 나는 대로 영덕을 찾는다. 그만큼 고향에 대한 배려가 깊고, 고향 발전을 위해 온 힘을 쏟아주고 있다. 이번 예선 두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해 한국축구의 영웅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라고 한 뒤 “영덕군민들이 직접 경기장을 찾지 못하더라도 길거리응원전을 통해 신 감독에게 힘을 보태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ilyodg@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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